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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내내 Nov 10. 2023

전국 남편 자랑 대회

판 깔아드립니다.

바지허물은 바닥에 척하고 벗어놓고는 팬티 바람으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는 남편의 꼴을 보아하니, 단전부터 화가 치밀어 오른다. “집에 일찍 도착했으면 빨래도 좀 돌리고 설거지라도 해놓지”라고 힐난하자 하려고 했다며 잔소리하지 말라고 한다.

나도 그 잔소리 좀 안 하고 싶다


전례 없는 저출산. 인터넷에는 예물 때문에 파혼한다라든가 고부갈등 때문에 이혼을 한다는 등, 수많은 싱글들이 결혼을 주저하게 만드는 콘텐츠들이 가득하다.


힘들 때 우는 자는 이류, 웃는 자는 일류라 했던가. 바지 허물로 시작된 오늘의 화를 기회로, 전국 남편 자랑 대회 한 번 열어보겠습니다.



저희 집 남편은 나름 브레인입니다. 시어머님이 자주 하시던 말이 있었는데요. “00는 (이과들이 본다는 어려운) 수리 가형 만점을 받았다”라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저희 애들 어린이집 담임선생님과 원장님에게 까지 할 줄은 몰랐지만요.


그렇게 똑똑했던 남편은 기자가 됐습니다. 뉴스를 보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알려준다는 점이 자랑입니다. 뉴스를 보다가 00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누구누구인데 지금 어쩌고 저쩌고 혐의를 받고 있다라며, 마치 시리 마냥 다다다다 대답해 줍니다. 기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 한국기자상을 30대 초반에 받았습니다.


국회 출입 기자 시절, 킥보드로 국회 구경 중


아이들에게 자상합니다. 직업 특성상 남편은 금/토를 쉬는데, 저는 토요일에 일을 많이 합니다. 그 결과, 남편은 애 둘 (3살, 6살)을 데리고 여기저기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한강 산책부터 카라반 캠핑까지 갑니다. 그래서 주변 엄마들은 00 아빠를 놀이터에서 봤는데 애들을 참 잘 본다며 칭찬을 많이 합니다.


집안일. 첫째 별이에게 "아빠는 집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야?" 물었더니, "아빤 집에서 청소하는 사람이야"라고 대답합니다. 참고로 엄마는 요리하는 사람이고요. 쉬는 금요일에는 화장실 청소 및 재활용을 버리고 세차를 하는 집안일을 참 잘하는 남편입니다. 금요일에만 한다는 게 문제지만.


담배를 안 피웁니다.


아… 다섯 문단 밖에 못 썼는데 한계가 왔네요. 남편 자랑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우리 남편의 장점은 고작 다섯 문단 밖에 없나? 미혼남녀 결혼율 및 출산율 제고를 위해 남편 자랑 해야 하는데, 고작 다섯 문단을 못 채운다. 대체 뭘 보고 남편이랑 결혼했나 곰곰이 생각해 본다. 생각해 보니 내가 견딜 수 없는 단점을 먼저 파악했고, 그 단점이 없는 사람이랑 결혼했다. 먼저 “나”를 먼저 알아야 했다. 결혼은 그 이후였다.


카톡에서 맞춤법 틀리면 만나기도 전부터 정이 떨어져 나갔다. 후각이 예민한 개코를 가져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 옆에 있으면 숨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말끝마다 Tlqkf을 붙이는 사람은 잠재적 가정폭행범 같았다. 술을 안 마시기 때문에 술주정이 심한 사람도 견딜 수 없었고. 이렇게 단점을 먼저 생각했고, 나머지는 다음 단계였다. 돈이 많거나 자상하거나 시댁이 좋은 건 다음 문제였다. 그런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서로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결혼하기 전까지 주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남편은 옆에서 식기 세척기를 사달라는 소원이 생길 정도로 집안일을 잘하는 살림꾼이 되었다. 집에서 게임만 하는 걸 좋아하던 총각은 그렇게 애들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가길 좋아하는 아빠가 됐다.


변한 건 남편만이 아니다.


30년 평생 요리는 해본 적이 없이 바빴던 커리어 우먼은 어디 가고, 어느새 양조간장과 진간장을 따로 쓰는 단계로 성장했다. 4계절 이불로 1년 내내 해질 때까지 쓰던 가난한 유학생은 어디 가고, 여름에는 시원한 냉감 이불을 겨울에는 극세사 이불을 꺼내 애들 침대를 정리하는 아줌마가 되었다.


다른 사람 둘이 만나서 서로 발전하는 것, 이것이 결혼의 최고 장점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무서운 시댁이야기, 파혼 이야기, 바람이야기도 물론 있지만, 현실에서는 이렇게 싸우고 서로 맞춰가며 보통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부부들도 많다는 걸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 애들에게 책 읽어주고 남편이랑 수다 떠느라 인터넷에 글 적을 시간이 없을 뿐.


미혼남녀들을 위해 댓글에 전국 남편 자랑 배틀 한 번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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