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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내내 Oct 29. 2023

약쟁이와 사기꾼 사이

허상을 쫓는 사회


빨간색 돼지 저금통. 대한민국 어린이라면 한번쯤은 갖고 있었을 저금통. 문구점 천장에는 뿌연 먼지가 쌓인 빨간색 돼지 저금통 한 다발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중 한 마리를 사 와서 용돈을 받으면 백 원, 오백 원씩 넣었다. 하루하루 돈을 넣을 때마다 무거워지는 돼지의 묵직함을 느끼며 행복한 상상을 했다.


이걸로 뭘 하지?
멜로디가 나오는 카드를 살까?
책을 살까?


마침내 돼지 저금통을 여는 날, 훅 풍기는 시큼한 금속향. 눈앞에 챠르릉 소리를 내며 굴러 나오는 백 원, 오백 원. 꼬깃꼬깃 들어간 천 원짜리 지폐. 간간히 들어있던 아빠 친구들이 주셨던 오천 원짜리 지폐. “이게 돈이구나”를 온 몸으로 경험했다.




오늘날 우리는 버스에 붙어 있는 “현금 없는 버스” 문구처럼, 현금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현금 없는 매장에서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고 카드로 결제한다.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면서, 괜히 내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신경 쓰인다. 메뉴의 그림과 설명을 충분히 읽고 내 마음속에 토너먼트를 시켜서 1, 2위 메뉴를 정한다. 고민 끝에 1위를 차지한 메뉴를 주문해야 하는데, 뒷사람이 빤히 쳐다보는 느낌에 빨리 눈에 보이는 걸 대충 누르고 결제버튼을 눌러 카드를 꼽는다. 띠링- “00에서 18000원이 결제되었습니다.”라는 문자가 온다. 결제를 다 하고 나니, 아차. 10% 할인 쿠폰 적용은 왜 기억이 안 났는지.


20년 전, 학부생이었던 시절, “Social Economy” 수업을 들었었다. 미국 자본주의 속에 있는 불평등을 공부하고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본주의 미국에서 굉장히 드문) 수업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교수님이 심각한 음모론자였던 것 같다. 어느 날 교수님은 우리가 내는 세금이 실체인지 허상인지 어떻게 알 수 있냐고 질문했다. 우리가 내는 세금이 몇 조 달러가 넘는데 그걸 실제로 본 사람이 있냐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는 현금만 쓴다,” “돈의 가치는 누가 결정하냐,” “연방은행이 돈을 얼마큼 찍어낼지 누가 아냐”는등 이야기를 했다. *참고로 그분은 박사까지 나오신 변호사셨다.




요즘 매일 나오는 연예인들의 마약 파문이나 전청조 사기 사건을 듣다 보니, 30년 전 빨간 돼지 저금통과 20년 전 음모론 교수님 생각난다.

현재 우린 어떤 시대에 살고 있나?




허상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실제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나타나 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것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 (표준 국어 대사전)


돼지 저금통 안의 동전처럼 돈의 묵직함을 느껴본 적이 언제일까? 월급은 통장으로 받고, 카드로 결제한다. 실제 안 보이는 돈은 내 은행계좌에서 주인 계좌로 가겠지. (물론 이 실제는 한 달 뒤 카드값나가는 날이 지나 텅 빈 통장 잔고를 봐야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비트코인을 쫓지만 비트코인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없다. 코인을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데, “머스크형은 화성 갈끄니까!!” 라며 도지코인을 산다. 주식도 마찬가지다. 봉투 값 200원이 아까워 양쪽 주머니에 내가 산 물건을 꾸역 꾸역 쑤셔 넣으면서도, - 8%는 언젠가 금방 올라갈 것이라는 허상을 안고 막연한 존버정신으로 버틴다. 이러한 허상을 쫓는 문화는 돈을 너머 우리 사회의 일상 전반에 녹아들었다.


최근 마약 파문이 일어난 L 씨, 예쁜 와이프와 자식이 있고, 100억대의 빌딩까지 소유하고 있는 자산가. 마약과 술집 접대부가 제공하는 드라마 속 허상에 살고 있었다. 마약에 중독돼도 존버 정신으로 버티면 해결될 거라는 허상. 나는 걸리지 않을꺼라는 허상. 우리는 현실에 두 발로 서 있는 존재라는 걸 망각하고.


”I am 신뢰에요.“ 로 유명해진 사기꾼 J. 그리고 그에 속아 넘어간 전 국가대표. 그들의 로맨스는 명품차와 고급 레지던스라는 허상이 빚은 사기극이 되었고, 전 국민의 의아함을 자아냈다. ”저런 거에 속는다고? 한패 아니야?“ 허상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된다. 이성적 판단은 사라지고 경주마처럼 허상이란 결승점을 향해 빨리 달려가야 할 것 같다. (물론 속인 사기꾼이 나쁜 거다.)


읽고, 보고, 듣고, 느끼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을 끊임없이 의심했던 사회는, 이제 허상의 시대로 바뀌었다. 어쩌면 이제 모든 사람은 허상을 쫓아 살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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