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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내내 Nov 27. 2023

돈이 없으면 시간으로

시간이 금이다.

“유아 돌봄 시설에 주 1회 이상 나가는 강사는 잠복결핵 검사지를 제출하세요.”라는 정부지침 내려왔다. 일반 병원(잠복결핵 검사가 가능한)에서는 검사 비용은 8만 원 정도라나.



검색을 해보니 몇몇 보건소에서 무료로 검사를 해준다는 희소식이다. 유치원이 속한 강남구 보건소에 전화를 하니 담당자로 전화를 돌려준다고 말하며 혹시나 끊길 경우를 대비하여 담당자 직통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담당자랑 통화를 하니 그 무료검사는 “노인 대상”이라며, 혹시 모르니 담당자 전화번호를 돌려준다.

응? 또 다른 담당자가 있었다고?
담당자가 아니었습니다~

담장자를 찾아 삼만리. 결국 4번의 서로 다른 담당자에게 소속유치원과 계약 형식을 이야기하고, 검사 가능 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보건소 주차장부터 늘어선 주차 대기줄을 보니 마음이 급해진다. 2층 결핵 접수실로 올라가자 여기가 보건소인지, 토요일 오후 마트의 계산대 대기 줄인 지 구별이 안 간다. 내 앞에는 “낮에 막걸리를 쪼끔 마셨는데, 괜찮냐 “라고 얼굴이 뻘건 채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고, 뒤에는 ”신분증이 없는데 검사를 받을 수 있냐 “고 무한 반복하며 물어보는 사람이 서 있다.


해내내님 들어오세요.
앞에 보세요.
숨 들이마시세요.
끝났습니다.


필요한 엑스레이를 찍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5초. 결과는 다음 주 월요일에 문자로 알려주겠다고 한다. 집 근처에서 받았으면 10분 내외로 걸렸을 일이, 보건소에 가니 (이동시간 포함) 대략 세 시간이 걸렸다. 현금 8만 원에 대한 시간 비용은 3시간이었다.



학부 4학년, 신학기. 그날은 통장 잔고가 100불 정도 남아있었다. 학비를 내고, 새 학기 교과서를 샀다. 아 월세도 냈었나? 근로장학생(TA) 주급이 들어올 때까지는 집밥으로 버티고 학교 도서관 무료커피 이용해야지라고 결연하게 플래너에 적었다. 하지만 전공 수업 첫날에 교생실습 대상 학생들은 건강검진 서류 (약 50만 원 정도)를 제출하라는 청천벼락같은 소리를 들었다. 내 수중에는 고작 13만 원 정도가 있는데.


평소 나의 사정을 알던 친한 흑인 아줌마 학생 J가 자기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 날 J 가 나를 데려간 곳은 흑인 슬럼 지역에 위치한 차상위 계층을 위한 무료 보건소였다.


그렇게 J와 들어간 무료보건소. 갈색인지 아이보리인지 모를 페인트가 칠해진 적막한 대기실 티브이에는 No Signals라는 글자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대기실 건너편에는 오줌냄새를 풍기고 있는 흑인 아저씨가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며 앉아있었다. 9:30에 도착해서 의사를 본 건 오후 1시였다. 끝나고 J가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말했다.

When you ain't got no cash, you pay with the precious coin of time.
현금이 없으면, 시간으로 지불해야 한다.


그렇다. J의 말대로 현금이 없던 20대의 나는 시간을 대가로 건강 검진을 받았다. 그리고 마흔을 앞둔 지금도 돈 대신 시간으로 결핵 검사를 받았다. 20대에 꿈꾸던 30대는 큰돈도 턱턱 내는 삶인 줄 알았는데, 마흔을 코앞에 둔 지금에도 돈이 없어 시간으로 지불하다니. 집 가는 9호선 급행 전철을 타는데 괜스레 처량해진다. 그러고는 새롭게 다짐한다.


오늘도 출근을 하고, 부동산과 주식 시황을 살피고, 유아 교육 논문을 읽고, 새벽에는 글을 쓴다. 50대엔 시간이 아닌 돈을 낼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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