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내내 Dec 01. 2023

유치원의 김장날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날

연간계획안 11월에는 빠짐없이 적혀있는 김장행사. 11월이 되자 정확한 김장 날짜가 나왔다. 11월 넷째 주 목요일.


텃밭이 있는 유치원은 9월부터 무나 배추 심기부터 김장준비 시작이다. 이 김장배추와 무는 11월 김장날에 앞서 수확한다.

첫째 유치원 연간계획안에 표기된 무심기와 김장하기



D-30

11월 김장날짜가 정해지자 학부모 노트 알리미에 도우미신청을 받는다고 올라온다. 요즘은 대부분이 워킹맘이라 아무도 신청하지 않는다. 결국 김장도우미도 각 연령별 학부모 대표님이나 전업맘/조부모님께 도와달라고 담임선생님들이 먼저 전화해서 물어본다. 엄마들에게 시댁 - 친정김장에 이은 유치원 김장 스트레스를 까지 주는 것 같아 죄송해진다.


D-4

11월 넷째 주 월요일부터 아이들에게 김장 교육이 시작된다. 놀이공간에는 김장놀이가 설치됐다. 고무장갑과 앞치마, 소쿠리까지 배치한다. 테이블 위에는 어떤 김치의 종류가 있는지 김치의 사진과 이름이 적혀있다.

아이들의 주도로 시작된 선생님들의 정성이 들어간 김장놀이가 완성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놀이 공간에 아이들이 규칙을 정한다. 몇 명이나 들어갈 수 있을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기본 뼈대를 잡아줘야 놀이 시작이 매끄럽다.


김치 만들기 동영상을 보고 이야기 나누기를 한다. 새롭게 들은 단어인 "버무리기"에 대한 뜻도 알아본다. 아이들은 김치에 달콤한 설탕이 들어간다는 말에 충격을 받는다. 똘똘이 스머프가 지난달 영양교육에서 받은 내용을 상기하며, "설탕은 가공식품이라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말한다. 6살 친구들이 충격으로 술렁거린다. 김장날 양념을 "한 장, 한 장 사이에 발라주기"를 하는 거라고 교육받았다. 물론 김장날 아침에 한번 더 교육할 예정이다.


D-1

새벽 4시, 절임배추 15박스가 도착했다. 조리사님은 멸치와 새우들을 사용하여 김장김치용 육수를 미리 끓어놓는다. 행정실선생님들도 모두 천 장갑에 고무장갑을 끼고 강당에서 파를 다듬고, 무는 채썰기 등 김치 양념을 만들 모든 재료를 다듬어 놓으신다. 아, 찹쌀풀도 만들어 놓으시고.


결전의 김장날

도우미 부모님들과 원장님, 담임, 부담임, 행정실 선생님, 조리사님, 차량 기사님까지 총 출동이다. 조리사님은 김장 총괄 프로듀서로 전투지휘하고 계신다. 김장 장소인 강당에는 감칠맛에 침샘을 자극하는 액젓냄새가 가득하고, 조리실에는 오늘 점심에 나올 수육이 벌써부터 냄비에 들어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선생님들을 위한 탱글탱글한 굴과 춍춍 썰은 청양고추, 그리고 상추까지 조리실 한편에 소박하게 담겨있다.


오늘 급식은 두 그릇 예약.

엘사에 붙은 김치 속, 너도 김치의 매운맛을 볼 줄 몰랐겠지.




지금까지 가족 김장행사에 참여한 적이 없다. 학창 시절에는 "애는 빠져라"라는 가족 철칙에 옆에서 겉절이만 주워 먹었다. 20살 이후에는 계속 미국에 있었고, 30살 이후에는 서울에서 직장생활 중인데 김장행사에 갈 틈이 없었다. 철들고 나서는 김장날에 엄마에게 현금을 보내는 걸로 의무를 다 했다.


오랜 유학생활 덕에 김치를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식습관을 가졌다. 라테의 유학시절 한인마트 진열장에 있던 병에 담긴 김치는 너무 비쌌다. 그렇게 20대를 보내니, "김치 없으면 못 살아!"라는 한국 DNA가 빠졌나 보다. 한국에 돌아와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고, 친정엄마가 가끔 보내주는 김치는 먹어치워야 하는 부채로 느껴졌다. 환기도 안 되는 5평 자취방에 가득 찬 김치냄새를 빼는 것도 부담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김치를 먹을 수 있는 유치원생을 만드는 게 숙명인 유치원생활에서는 김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식재료이다. 5살부터 제공되는 안 매운 김치부터 6살엔 약간 매운 어린이 김치가 제공된다. 6살부터 맵부심이 나타나며, "매워도 먹을 수 있어요!"라든가 "이 깍두기는 하나도 안 매워!"같은 허세와 함께 볼 빨간 얼굴로 습습하하거리며 김치를 먹는다. 눈에 맺힌 눈물은 모른척해주자.



유치원은 외국인을 거의 뽑지 않는다. 어느 나라든 유치원교사의 자격요건은 비슷하다. 4년제 대학에 보딩시험을 통과하고 일정기간 연수를 받는다. 하지만, 이민자의 나라인 호주나 미국과는 달리 단일 ethnicity로 구성된 독일, 한국 같은 나라에서 외국인이 유치원교사를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물론 어린이집개념의 Dacycare에서는 일할 수 있지만, 병설유치원이라든가 00 부속 유치원 등 흔히 "좋은 유치원"에 외국인이 취업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나저나 데이케어는 박봉이라 비추함) 그 이유는 유치원은 그 나라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시기"의 교육 기관이기 때문이다.


Third Culture Kids는 미국 사회학자인 Ruth Hill Useem이 1950년대에 제안한 사회학 용어이다.

... for children who spend their formative years in places that are not their parents’ homeland. Globalisation has made TCKs more common. (...) life as a TCK can create a sense of rootlessness and restlessness, where home is “everywhere and nowhere.”
어린 시절 부모가 속한 나라(문화)에서 자라지 않은 어린이들. Third Culture Kids는 뿌리가 없다는 감정과 기대어 쉴 곳이 없는 감정을 갖게 된다. 집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감정을 느끼면서 (BBC)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결핍을 느끼는 것은 TCK가 극복해야 하는 큰 산이다. 그래서 어린이 기관은 각 나라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그 나라 사람을 고용하는 게 우선한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세시풍속을 지니며,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관념적 문화적 정체성까지 연장되어 직접 가르치지는 않아도, 주변 환경만으로도 어린이들에게 "네가 속한 곳은 여기 대한민국"이란 걸 은연중에 심어주고 있다.



요즘과 같은 글로벌 세계에 "웬 국뽕대잔치?"라고 할 수 있지만, 글로벌 세계인만큼 각 나라의 Locality (로컬, 지역성)을 더 강조해야 한다. 교통수단과 인터넷등의 발달로 사람들이 다양한 공통점으로 연결됐다. 그만큼 사람들은 다차원적이고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만해도 영어강사모임, 00 맘카페, 글작가모임, 새벽글쓰기모임, 첫째와 둘째 단톡방등 여기저기 곁다리를 걸쳐놨다. 옆에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남편은 00게임카페와 라튼 토마토 (영화 리뷰카페)를 걸쳐놨다. 하지만 이렇게 공통점 하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하게 연결된 네트워크 세상 속에서 하루를 보내도, 결국 마지막엔 "우리 집"으로 돌아간다.


유치원은 어린이들에게 한국인이란 일체감을 만들고 공동의 선을 찾아가게 해야 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한국인이란 "우리 집"을 만들어 주는 건, 오늘 어린이들이 배추 한 장 한 장에 정성스럽게 넣었던 빨간 김장 양념 속 부터 시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치원에서 일해서 다행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