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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내내 Nov 30. 2023

유치원에서 일해서 다행이야

첫 눈을 그대들과 함께

오후 2시, 한창 5살 반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교실 한편에서 방송이 나온다.

"지금 밖에 눈이 오고 있어요"


아니나 다를까, 교실을 둘러싼 창문 밖을 보니 나무 사이로 함박눈이 떨어지는 게 보인다. 어제는 우리 유치원의 공식 첫눈이 온 날이었다. 평일 9시부터 3시 사이에 눈으로 관측될만한 첫눈. 아이들은 방송을 듣자마자 "와, 눈이다!"라든가 "선샘미, 눈이 와요."라고 신나 한다.


사실, 나는 친한 언니랑 브런치를 먹으며 첫눈을 맞았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유치원의 공식 첫눈은 아니었던걸로.


한창 배우고 있던 Jungle Book은 한켠에 접어두고, 눈 오는 날에 부를만한 (영어) 노래는 뭐가 있는지 물어본다. 아이들과 생각 나누기와 손들기 투표를 통해서 당첨된 노래는 엘사의 주제곡, "Let It Go"였다. (그나저나 라테는 당연히 "Let It Snow"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세대차이를 느낀다.) 열심히 Let it go, let it go 부분만 열심히 부르다가 영어 수업이 끝났다.


두 명의 보조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의 재빠른 손놀림으로 패딩에 부츠까지 빵빵하게 입은 5살 친구들은 유치원 옆 놀이터에서 눈 내리는 날을 오감으로 즐긴다. 눈 오는 날 강아지가 무엇인지 놀이터를 뛰어 다니며 온몸으로 보여주는 5살이다. 아쉽지만, 감기가 무섭기도 하고 하원시간이 다가와 5분 정도만 바깥바람을 쐬고 들어와 하원준비를 한다. 이제 5살 친구들은 "눈"을 주제로 교실에서 놀이를 시작하겠지.



눈 오는 날은 출퇴근이 불편한 하루가 된 어른이 됐다. 하지만 첫눈을 본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이럴 때는 20살부터 이 업계에 몸을 담은 이유를 생각해 본다. 처음에는 미국 비자가 쉽게 나온다는 간호학을 전공했는데, 돼지를 해부하는 실습시간에 미묘한 냄새에 마음을 접었다. 


한참 우울해 하던 나를 위로해주던건 호스트가족의 어린 애들이었다. 영어가 서투른 나에게 책을 계속 읽어달라그러고, 놀아달라고 하던 만5세 어린이. 이걸 시작으로 유아교육을 전공했고, 살아있는 실용 학문 바탕에 있는 고전 이론들에 열광했다. 지금도 "이 이론을 이렇게 적용시키니, 이렇게 되는구나. 나도 교실에서 이렇게 적용해 봐야겠다" 고 논문을 읽고, 메모하고, 계획한다.


나의 행복은 출근을 하면서 시작된다. 유치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제 만났는데도 10년 동안 못 본 것처럼 "해내내 선생님!!" 외치며 뛰어와 나를 안아주는 아이들. (아. 아이들의 손은 침과 코딱지, 땀으로 얼룩져있으니, 유치원 출근복은 두 개로 돌려 막고 마음껏 안아주자.) 어느 직장에서 출근을 한 사람을 저렇게 사랑과 기쁨으로 반겨줄까? 이건 어린이들과 일하는 사람만의 특권이 아닐까.


처음에는 알파벳하나 못 읽던 친구들이 이젠 간단하게 단어라도 읽을 수 있게 됐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감당할 만한) 스트레스는 있었지만, 결국 해내게 된 자신을 보며 "해내내 선샘미, 저 영어 엄청 잘해요."라며 광대를 올리며 뿌듯해한다. 본격적인 12년 학습레이스가 시작되기 전 충분히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있는 아이들. 자기애가 충만한 시절의 아이들은 주변에 있는 나도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아, 유치원에서 일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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