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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연 Aug 01. 2019

나의 소확행은 소확행이 아니었다.

7월 마지막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 식탁

 좀처럼 외식을 하지 않으며 세끼 밥을 먹으며 지내도 좀처럼 밥이 지겹지 않은, 빼도 박도 못하는 밥순이다. 여름철 점심이면 현미밥에 오이지무침, 열무김치만 있어도 뚝딱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여기에 가지찜, 마늘을 더한 감자채전을 올리니 진수성찬이다. 감자채전에는 애호박으로 만든 바바가누쉬를 곁들였다. 여름의 정점에 달하니, 한여름 채소의 대표 주자 가지에도 가벼운 조리만을 해준다. 하지만, 무엇이든 과한 것은 금물. 토마토, 애호박, 가지와 같은 한여름 채소는 음의 성질이 무척이나 강하니, 아무리 여름철이어도 필요한 조리를 해주어야 다가올 가을에 고생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에서 눈여겨 보고 있던 농원에서 그린빈과 바질을 주문했다. 바질은 박스를 열때부터 강한 향과 크기에 압도 당했다. 기껏해야 중지 손가락 두마디 정도 크기가 되는 우리집 바질과는 달리 손바닥 길이 만한 녀석도 있다. 벌레가 나눠먹어 구멍이 송송 뚫린 모습도 정겹다. 

 그린빈은 주문하기 전부터 그 실한 모습에 반해 주문했는데 후회없는 선택이었다. 이렇게 도착한 그린빈은 질긴 힘줄을 품은 아이들도 간혹 있으니, 꼭지를 따내며 손질해주어야 한다. 식당 영업준비에 앞서 비소리를 들으며 그린빈 손질을 한다.

 채소를 손질하다 보면 기분이 좋다. 크기가 제멋대로인 토마토, 그윽한 향을 품은 바질…섬세한 면이 조금은 부족한 사람이다보니 핸드폰 배경화면, 메신저 대화창 배경화면 등을 좋아하는 사진으로 바꿔두는 수고를 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채소를 손질하고 나면 좋아하는 채소사진으로 핸드폰 배경화면을 바꿔둔다. 이렇게 이따금씩 혼자 채소를 손질하다보면 마냥 기분이 좋아서, ‘참 별거 아닌 걸로 기분좋아지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한때 유행했던 ‘소확행’이라는게 이런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의 소확행은 과연 소확행이었을까. 

 몇일 하늘이 뚫린 듯이 비가 내렸다. 안올때는 답답하도록 안오더니, 기다리던 비가 내리니 야속하도록 많이 내린다. 상수역에서 내려 프로젝트 하다를 향하며 5분 남짓 걸어온 것 만으로도 바지가 젖는데, 이 비를 뚫고 채소를 수확하는 누군가가 있다. 때로는 내새끼 같은 애들이 쑥대밭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었던 채소들은 소소하게 키워진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감사하게 먹어야 한다. 먹거리로 장난을 쳐서도 안되고. 

 식당영업을 하다보면 밥은 반이상 남기고 디저트를 주문하는 손님들이 간혹 있다. 매주 바뀌는 식사 메뉴에 더불어 디저트 메뉴도 자주 바뀌기에 디저트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마음이 고맙기는 하다. 하지만, 저렴한 가격에 다회용 포장용기를 살 수있으니, 디저트는 포장해가고, 밥부터 다 드시면 좋겠다. 식사를 만든 나의 수고도 허무해지고, 내 손길을 거쳐간 재료들에게도 민망하다. 이런 취급을 받을 바에야 일반 가정의 주방으로 들어갔다면 조금 더 귀한 대접을 받았을텐데...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어느덧 정이 들어버린 그린빈을 손질하며 왠지 울적해졌다.


 비오는 금요일 오전. 비가 오기에 손님들의 발걸음은 적겠지만, 예고한 대로 나의 플레이트는 준비되어있다. 지난주 팝업식당 오늘의 마크로플레이트.

현미밥

태국풍 바질 채소 볶음

모히토풍 콘샐러드

감자사라다

로메스코소스를 곁들인 그린빈

두부 부추 된장국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태국의 ‘가파오 라이스’를 마크로비오틱으로 재해석했다. 콩고기나 밀고기 없이도 어느 슈퍼마켓에서도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고기를 대신하고 달콤하게 볶은 양파와 파프리카가 설탕을 대신한다. 게다가 싱싱한 바질을 듬뿍 넣으니 태국 음식점에서 먹던 가파오 라이스가 부럽지 않다.

 초당옥수수의 바톤을 이어 받은 찰옥수수로는 모히토풍의 샐러드를 만들었다. 휴양지, 휴가철을 책임져 주는 달콤하고 시원한 손님 모히토. 하지만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빙수, 얼음과 시럽을 섞은 탄산음료를 즐겨 마시다가 에어컨 바람을 쐬면 냉방병, 여름 감기에 걸리기 일쑤. 그래서 만들어 보았다. 제철 채소, 과일과 스파이스, 그리고 허브로 만든 ‘먹는’ 모히토. 알콜, 감미료 하나 없이도 마시는 모히토 부럽지 않은 색다른 모히토를 만들 수 있다.

 구워먹고 국에도 넣어 먹고 튀겨도 먹어본 감자는 두부크림과 함께 으깨어 자색양파, 오이, 당근과 함께 버무려 정겨운 사라다를 만들어 보았다. 나의 마크로비오틱 플레이트에서 시판 두유마요네즈와 같은 기름 가득한 소스를 사용할리가 없다. 최소한의 기름만을 사용해 만든 두부크림은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을 책임져 준다. 

 손끝이 아려도록 다듬은 그린빈은 가볍게 데쳐 로메스코 소스를 얹었다. 데치기만 한 것이 조금 민망할 뻔했는데 농부님이 워낙에 실한 그린빈을 보내주셔 이 소중한 재료 본연의 맛을 손님들이 느낄 수 있게끔 데치기로 한것이 다행이다. 스페인식 파프리카 소스인 로메스코소스는 국내산 유기농 재료만을 사용해 만들어 보았다. 일반적으로 파프리카를 직화에 구워 껍질을 벗겨내는데, 마크로비오틱 스타일 조리법으로 온 주방에 탄내를 풍기지 않고도 만들어내었다. 각종 비건 요리에 등장하는 페스토, 소스 류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기름이 사용되는데, 약간의 정성을 더하니 로메스코소스 역시 기름없이 만들 수 있다.

 조금 남은 초당옥수수로는 달콤하면서도 짭짤한 머핀을 만들어보았다. 기존 레시피에 비해 감미료를 반 이상은 줄여 만들지만 초당옥수수 본연의 달콤함과 짭짤한 맛이 어우러져 몸에 주는 부담을 더더욱 줄였다.


 유난히 채를 썰거다 잘게 깍뚝써는 조리가 많은 나의 음식. 소스도 시판 제품없이 만들어내기에, 조리과정을 묻는 손님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영업전날 부터 분주히 밑작업을 하는 이 과정은 몇달전부터 나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작은 플레이트에 차려진 한끼 식사. 도산공원 옆에서 먹을 수 있는 유명 쉐프의 음식과는 다르지만 이런 플레이트를 즐기는 시간이 누군가에게 ‘소확행’이 될수도 있지 않을까. 준비하는 과정은 사실 ‘소소’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 편안하면서도 소소한 행복을 선사하는 식사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홀로 앉아 그린빈을 손질한다.


마크로비오틱이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마크로비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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