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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연 Sep 03. 2019

현미밥, 된장국만이 마크로비오틱인 것은 아니다

8월 마지막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 밥상

이제 아침에는 소매가 짧은 옷을 입으면 제법 쌀쌀하다. 쌀을 씻을때에 손끝에 닿는 물온도도 확연히 다르다. 낮과 밤의 일교차도 크기에 감기에 걸리기도 쉬운 날씨. 한동안 쉬고 있던 압력밥솥을 꺼냈다. 컨디션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주식인 밥부터 바꾸어주는 것이 마크로비오틱이다. 때문에 나의 작은 식당에서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매주 메뉴도 바뀌지만 조리법도 바뀐다. 도무지 매뉴얼화 할수 없고, 때문에 일주일에 이틀만 운영할 수 있는, 눈을 씻고 찾아도 사업을 키울 생각이라고는 없는 식당.

습도와 냉기를 피해 선선한 곳에서 보관한 단호박이 참 맛있다. 단호박 보관법을 제대로 알아두어서 그런지, 꽁꽁 랩에 싸여 냉장고에 들어있는 단호박을 보면 감기걸려 추워보이는데, 카운터에 내어둔 단호박은 일몰을 느끼며 서있는 당당한 자태로까지 보인다. 하지만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두어라. 넌 곧 커리가 될 운명이니…

 일몰을 받아 생명력 넘치는 단호박으로 만든 지난주 팝업식당 오늘의 마크로 플레이트

압력밥솥에 지은 현미밥

단호박커리

양배추김치

햇고구마 레몬소금조림

수수 함박스테이크

당근라페

 마크로비오틱과 채식은 엄격하고 고지식하다는 인상도 있기에, 나 만큼은 비교적 유연한 사고를 가지려고 하는편이지만, 그래도 절대로 손을 대지 않는 음식 중 한가지가 시판 인스턴트 ‘카레’이다. 성분표를 들여다보면 아찔해진다. 각종 가공기름과 첨가물로 범벅이 되어, 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실험실의 쥐가 된 기분일것만 같다. 

 그렇다고 해서 향긋한 커리를 전혀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 계절, 완숙토마토와 단호박이 있다면, 첨가물 하나 없이도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산미를 가진 마크로비오틱 커리를 만들 수 있다. 시판 인스턴트 커리는 정제된 밀가루와 각종 기름으로 농도를 맞추었지만, 단호박을 껍질째 갈아 넣는 나의 마크로비오틱 커리는 밀가루는 커녕 다른 곡식가루도 들어가지 않는다. 시판 루, 또는 인스턴트 ‘카레’가루 없이 커리를 만드는 것은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향신료는 백화점 식품매장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다.

 미리 담그어 두었던 양배추 김치도 등장했다. (인도사람들이 보면 화들짝 놀랄 조합이지만, 한국인 입맛에는 역시 커리와 김치의 조합은 제법 잘 어울린다.) 젓갈없이 어떻게 만드냐며 다들 놀라워 하기도 하지만, 제철 채소, 과일, 곡식으로 만든 나의 마크로비오틱 김치는 젓갈, 설탕이 없이도 발효하고 기가 막힌 맛으로 익는다.

 커리와 김치 모두 마크로비오틱과는 거리가 멀것 같은 조합이지만, 현미밥, 된장국, 채소반찬을 곁들인 밥상만이 마크로비오틱 인것은 아니다. 넓은 시야를 갖고 자연스럽고 생명력 넘치는 재료를 체질과 기후에 맞게 조리해내면 그것이 마크로비오틱 요리가 된다. 나의 식당에서는 마크로비오틱 부리또, 오픈샌드위치, 그라탕을 낸 적도 있으며, 나는 마크로비오틱 베이킹 수업까지 하고 있다. 이처럼 마크로비오틱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떤 마크로비오틱 음식을 만들더라도, 자신의 몸에 필요한 재료와 조리인지를 스스로 이해하는 것이며, 삶에 있어서도 자신에게 필요한것과 그렇지 못한것을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갖는것이다. 이처럼 마크로비오틱은 식생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금요일 토요일 영업이 지나고 보니 집에 이렇다할 재료는 없고, 장을 보러 나가기는 귀찮다. 찬장을 뒤적여 보니 고대유물 두개가 나온다. 내가 처음 만들었던 그릇과 도토리 건조묵. 도토리건조묵을 보니 문득 쫄깃한 것이 먹고 싶다. 느타리버섯과 함께 장조림만들듯 짭잘하게 졸이고 찐기장, 깻잎과 버무리니 막걸리를 부르는 맛의 반찬 탄생이다. 한 때 그릇만드는 데 빠져 살던 추억도 꺼내어보며 나의 첫 그릇에 묵장조림을 담아보니 제법 잘어울린다. 아직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은 건조묵. 오랜만에 쫄깃한 건조묵을 먹으니 다가올 추운 계절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진다.

 밤낮, 어제오늘 가리지 않고 날씨가 오락가락한다. 좀처럼 피로도 풀리지 않는다. 이럴때는 무언가를 먹어서 몸보신을 하는 덧셈의 처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뺄셈의 처방을 한다. 이것저것 걸러내느라 지쳤을 장기에게도 쉬는 시간을 주는 것과도 같다. 곁들이는 국, 반찬은 가급적 음과 양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것으로 준비하고, 소식을 한다. 중용의 들깨미역국과 우메보시를 얹은 현미밥으로 가볍게 한끼 식사를 준비했다. 미역국은 일반적으로 고기, 또는 조갯살과 함께 끓이는데, 이는 재료의 궁합이 썩 좋지 못하다. 특히나 소고기 미역국은 더더욱. 방송과 인터넷을 보면 해조류는 몸에 좋으니 꼭 챙겨먹으라고들 하던데, 이런식으로 동물성식품과 범벅을 해서 먹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기름발라 정제염뿌려 구운 김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마크로비오틱은 방송, 인터넷이 뿜어내는 천편일률적인 건강 지식을 내려놓고 자신의 몸과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 날 나에게는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중용의 식사가 필요했다. 재료를 음과 양의 순서대로 번갈아가며 조리한 들깨 미역국은 과하게 느끼하지도, 텁텁하지도 않아 이 날 나에게 꼭 필요한 국이었다. 날이 조금 추울 때에는 이 재료를 더하고, 반대로 조금 가볍게 먹어도 될 때에는 저 재료를 더해보면 좋겠구나. 미역국 한그릇을 놓고도 응용방법을 생각할 수 있으니 실로, 마크로비오틱의 세계는 끝이 없구나. 생각을 반찬 삼아 가벼운 한끼로 피로를 달랬다.


마크로비오틱이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마크로비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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