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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연 Sep 07. 2019

고구마순을 다듬는 시간도 때로는 낭만적이다

9월 첫째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밥상

한동안 열심히 밥을 해먹었더니 다시 엄마가 슬금슬금 대형 체인점 빵을 사오기 시작한다. 첨가물 덩어리니 사먹지 말라고 그리 일러두었거늘… 체인점 빵을 몰아낼겸, 레시피를 수정할 겸 오랜만에 현미죽으로 현미죽빵을 만들어 본다.

 몇번인가 천연발효빵 수업을 듣고난 뒤 현미죽빵을 만들어보니 그 장단점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현미죽빵에는 만들기 간편하다는 최대의 장점이 있지만, 발효가 없으니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빵의 맛과 질감은 느낄 수 없다. 최근에는 천연효모를 사용해 현미밥을 넣고 굽는 현미롤빵도 배웠는데, 현미롤빵과 현미죽빵은 재료는 거의 동일한데 만드는 과정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니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현미롤빵을 선택하겠다. 맛은 물론이며, 소화 흡수가 편한 조리과정을 거쳤는가를 기준으로 선택했다. 현미죽빵은 나의 모교, 마크로비오틱 쿠킹스쿨 리마에서 배운 전통적인 레시피이지만, 아무리 전통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이 진정 최상의 레시피인지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모교의 선생님들도 그렇게 가르치셨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것. 나의 선생님들도 그렇게 꾸준히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고, 커리큘럼을 수정해 왔다. 

얼마전 만들었던 현미롤빵

 현미롤빵이 압도적으로 우수할 뿐, 물론 현미죽빵도 훌륭한 레시피이다. 구수하면서도 쫄깃한 맛이 새롭다. 이른 아침, 애매하게 남아있던 자투리 당근과 단호박으로 걸쭉한 스프를 만들어 빵에 곁들여 먹었다. 정성을 들여 차린 아침식사는 하루의 시작을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 혼자 살며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 이 여유를 느끼기 위해, 목요일, 금요일에는 미리 장을 봐두고, 토요일 오전, 점심에는 약속을 잡지 않을 정도 였다. 

 가을 채소들로 기가 막힌 된장국을 만들었다. 시원한 무와 달콤한 단호박, 게다가 다채로운 식감까지. 된장국과 김치만으로도 한끼를 순식간에 해결했다. 재료의 조합과 조리과정도 중용의 미학을 갖추었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마크로비오틱 식생활에서는 컨디션과 체질에 맞춰 식단을 바꾼다. 주로 주식(밥) 짓는 방법과 반찬이 주목을 받는데 곁들이는 국물요리도 무시할 수 없다. 된장국 하나만을 놓고 보더라도 채수의 비율, 곁들이는 부재료 등을 바꿔가며 본인의 체질에 맞는 된장국을 만들 수 있으며, 조리 방법과 순서도 무궁무진하다. 나의 식당에서도 된장국을 곧잘 내는데 주로 계절마다 두 종류 이상의 된장국을 낸다. 분명히 같은 된장을 쓰는데 그 맛은 전혀 다르다. 심지어 만들기도 간단하고, 한번에 많이 만들 수 있으니 효자와도 같은 메뉴이다. 주말에 잠시 시간을 내어 국을 대량생산 해두면 며칠이 든든하다. 바쁜 출근 시간, 퇴근 후 애매한 식사 시간에도 밥과 국을 데워 먹으면 간단하게 한 끼가 해결 된다. 포만감도 있으니 애매하게 간식을 먹을 필요도 없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우리가족은 재채기, 콧물, 눈물로 고생을 한다. 여름철 체내에 머물러 있던 수분을 빼내고자 몸이 안간힘을 부리는 신호다. 이 때문에도 슬슬 여름채소, 음의 성질이 강한 것들은 줄이고, 양의 성질을 더한 것들을 조금씩 늘려야 한다. 콩류 중에서는 양의 성질이 가장 강한 팥을 넣고 압력솥에 밥을 지었다. 우리가족도 좋아하는 팥밥을 내었더니 압력솥밥보다 냄비밥을 좋아하는 엄마도 신이 났다.

 고구마순도 끝물이다. 껍질을 벗겨낼 일이 아득해, 식당메뉴로 낼 생각은 없었는데, 이 맛있는 것을 손님들과 나누지 않고 올해를 보낸다니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다. 결국 일을 벌렸다. 식당메뉴에도 고구마순을 사용한 메뉴를 내기로 했다. 얼마전 터득한 고구마순 쉽게 벗기는 비법도 있으니 걱정도 덜하다. 

 최근 몇달은 영업전날, 식당에서 혼자 밑작업을 했는데, 이번달부터 영업전날 내가 빌린 공간, 프로젝트하다를 사용하는 분이 생겨, 오랜만에 집에서 밑작업을 했다. 학창시절 즐겨듣던 라디오프로그램을 오랜만에 들으며 혼자 일하는 시간에서 묘한 자유를 느꼈기에 이 점이 아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느덧 혼자 일하는 것이 익숙해져, 집에서 하려니 온통 신경이 곤두서있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와 마주앉아 TV에서 흘러나오는 일일연속극 흉을 보며 고구마순을 다듬는 시간은 별거아닌 듯 해도 낭만적인 시간이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야간자율학습으로 밤 늦게 집에 들어왔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혼자 나가 살았으니 가족과 밤에 TV를 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지는 10년이 훨씬 넘은 듯하다. 나와 비슷한 30대도 많지 않을까? 당연했고 지금도 당연할 거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어느새 당연하지 않아져 있을수도 있다. 그러니 때로는 잠시 멈춰 생각해보자. 너무 당연해 잊고 있던, 그래서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그곳에서 작지만 큰 행복을 다시 찾을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크로비오틱이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마크로비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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