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셋째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 밥상
이틀 연달아 진행한 베이킹클래스를 마무리 짓고보니 어느덧 저녁식사 시간이다. 엄마가 두끼 분량으로 챙겨준 도시락을 점심때 모조리 털어먹었다. 저녁식사로는 가을 버전 부리또를 해먹을 계획이었다. 냉동실속 통밀또띠아와 잡곡우엉라구소스를 해동해두었고 베이킹 수업용으로 준비하곤 하는 고구마도 넉넉히 쪄두었다. 애매하게 남아있던 양배추와 당근은 채썰어 프레스샐러드로 만들어두었다.
이렇게 일터에서도 손을 움직여 새로운 메뉴를 하나 만드니, 수업후 뒷정리를 마치고 혼자 먹는 저녁식사이지만, 식사를 제대로 챙긴듯한 기분이 들어 뿌듯하다. 여름음식같아 보이지만 뿌리채소의 가을맛이 느껴지고, 맥주가 어울릴듯 해 보이지만 와인도 어울릴듯한 메뉴가 탄생했다.도시락메뉴로 챙겨 가을소풍을 떠나도 좋을 것 같다.
다음날에는, 오랜만에 베이킹이 아닌, 쿠킹클래스를 진행했다. 롯데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의뢰가 있어 몇달전부터 준비해둔 일정이었다. 짧은 시간이기에 전달할 수 있는 내용과 레시피에는 한계가 있다. 적은 반찬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덮밥 메뉴와 간단한 반찬 두가지를 준비했는데 나의 넘치는 열정과 익숙하지 않은 주방사정에 수업종료시간이 엄청나게 지연됐다... 이론만이라도 제대로 전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남의 주방에서 쿠킹클래스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기에, 한동안 쿠킹클래스는 정중히 사양하고 있었는데,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는 감상이다. 조리도구, 불(가급적 인덕션 보다는 가스) 등 재료 뿐만 아니라 조리 환경에 대해서도 권장하는 바가 있는 마크로비오틱이기에, 내가 원하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외부 강의는 신중하게 대하려고 하는 편이기도 하다. 때문에도 하루라도 빨리 내 공간에서 클래스를 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오랜만의 쿠킹클래스를 마치고 저녁에는 녹초가 되어 반찬을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 아니, 만들지 않았다. 지치고 힘든 날에는 칼을 잡지 않는 편이 낫다. 음식에는 만든 사람의 마음이 담긴다.
그 덕에 아침에 일어나 보니 텅빈 냉장고가 나를 맞이한다. 다행히, 냉동실에서는 미리 만들어 두었던 캄파뉴 한장이, 냉장고에서는 주말에 만들어둔 프레스 샐러드가 발견됐다. 만들어둔 스프도 없으니 곡물커피와 단출하게 아침식사를 차렸다. 때로는 이런 날도 있는 법. 힘든 마음으로 만든 맛없는 음식을 화려하게 차려놓기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었던 정성 담긴 음식 몇가지만 차려놓은 식탁이 나에게는 더 행복하다. 거실에서 곡물커피를 홀짝이며 먹는 고요한 아침식사에 잠시 한 숨을 돌렸다.
하지만 이내 밥과 반찬이 그리워진다. 쿠킹클래스 이후 연근이 남았다. 연근, 우엉 등 뿌리채소가 많아 마크로비오틱 대표반찬들이 곧잘 식탁에 오르는 계절이다. 이번에는 연근 톳조림을 만들었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무척 맛있는 반찬의 대표주자 중 하나. 제대로 만드는 것이 쉽지 않기도 하지만 몇가지 포인트만 잡으면 끈덕하지 않게 제대로 양의 성질을 살려 만들수 있다. 하지만, 그 만큼 양이 강하기에 한끼에 많은 양을 먹지는 않는다. 한끼에 한두젓갈로도 충분하다.
즐겨만드는 프레스 샐러드는 이번에는 당근을 채썰어 만들고 기장을 곁들였다. 반찬에도 곡식을 곁들여 식사의 60%이상을 곡식으로 채웠다. 여기에 기본반찬과 간단하게 미역국을 곁들이니 영락없는 마크로비오틱 기본식. 때로는 빵도 먹고, 부리또도 먹지만 역시 나에게는 중용에 가까운 기본식이 가장 편하다.
부모님이 여행을 떠나 며칠간 혼자 지냈다. 냉장고에서 엄마가 남기고 떠난 알배추를 발견했다. 벌써 배추라니. 몇주전에만 해도 반팔을 입고 다닐 정도 였는데. 시간이란, 계절이란 신기한 녀석이다. 잔인할 정도로 추운 한반도의 겨울을 좋아하지 않지만, 연말은 좋아한다. 거리에 흘러나오는 캐롤, 크리스마스 장식과 일루미네이션,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설레는 마음. 배추를 보고는 벌써부터 겨울과 연말을 떠올렸다. 10월에 할로윈보다도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걸 보니 역시 요즘 젊은이는 아닌 듯하다.
겨울과 연말에는 뭐니뭐니해도 전골이다. 일본의 작은 도시, 교토에서 대학생활을 했기에, 주변 친구들도 교토 토박이 보다는 다른 지역출신이 훨씬 많았다. 모두가 자취를 했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친구집에 모여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가을, 겨울이면 삼삼오오 친구집에 모여 전골파티를 하기도 했다. 이날 만큼은 소고기를 사와, 고타츠 위에서 끓어가는 전골에서 고기와 배추를 건져 먹으며, TV속 피겨스케이팅 중계에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그 때 TV 속 소녀는 이제 여왕이 되었고, 소고기에 밀려 전골 속 조연이던 배추는 이제 나의 전골에서 만큼은 주인공이다. 잡곡과 각종 채소를 다져 소를 만들고 배추로 또르르 말아, 배추롤을 만들었다. 다음에는 당면, 버섯등도 곁들여 식탁 한가운데에 놓고 다같이 먹고 싶다.
마트에서 1+1 하는 수입산 소고기와 시판 전골 국물로 전골을 만들어 먹던 내가 이제는 식물성 재료만으로 전골을 만들어 먹는다. 심지어 그 시절에는 그 고기기름 가득한 국물에 우동을 끓이는 것으로 식사를 마무리할 정도였다. 터질듯한 배를 통통 두들기며 후식을 찾기도 했다. 지금의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친구들과 모여 앉아 소고기 전골을 먹고 함께 고기국물 우동을 나눠 먹던 시절도 있어 20대 초반의 나의 겨울은 아름다웠다. 이제는 그 친구들도 나와 함께 채식 음식점에 가주고, 나의 식당에도 와준다. 올해 겨울에도 그들을 만날 것 같다. 30대 초반의 나의 겨울도 그들이 아름답게 만들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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