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셋째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 밥상
휴가를 얻어 홍콩에 다녀오고 나니 서울에는 어느덧 단풍이 절정이다. 홍콩에서 초가을을 맛보고 서울에서는 가을의 끝자락을 맛본다. 계절을 두번 경험한 듯해 득을 본 듯한 느낌.
일요일마다 쿠킹클래스가 있던탓에 두어달만에 혜화 마르쉐를 방문했다. 마지막으로 왔던 때에는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마늘과 허브 등을 구매했던 듯한데, 이번에는 무, 순무, 사과 등을 샀다. 흙이 묻은 뿌리 부분을 종이로 감싸 장바구니에 꾹꾹 밀어 넣어 보지만, 힘차게 뻗어오른 무청이 삐죽 장바구니 밖으로 튀어 나온다. 주말 오후 4호선 열차 안, 장바구니 밖을 뛰쳐나온 무청으로 여러 사람을 툭툭 치는 민폐꾼이 되었다. 하지만 ‘마트에서 장보는 늬들은 요게 을매나 맛있는지 모를거다’ 하는 마음이 들어 조금은 우쭐하기도 하다.
작업실에 도착해 짐을 푸르기가 무섭게 재료 손질에 돌입. 흙 묻은 생강은 곱게 씻고 소분해 일부는 다지고 일부는 편을 썰어 얼려둔다. 유기농 제철 생강을 입수했으니 두고두고 요긴하게 쓰기 위해서다. 다져둔 것은 김치를 담글 때마다 활약해준다. 무와 순무도 무청과 뿌리부분으로 나누어 손질해 둔다. 순무청은 내일 바로 써먹고, 무청은 애껴두었다가 된장국을 끓여 먹으면 참 시원하겠지.
실한 무로는 깍두기를 담근다. 꽤나 체력을 소진해 다음날 담글까도 싶었는데, 사자마자 담그기를 잘했다. 칼질을 할 때부터 청량한 수분감에 자꾸만 무를 집어 먹고 싶었다. 마치 잘 익은 배를 써는 듯한 느낌이다. 원래 모든 음식을 비건으로 만들기에, 나의 김치에는 젓갈이 들어가지 않지만, 특히나 싱싱하고 실한 재료를 사용할 때에는 젓갈 없이 담가 보기를 권한다. 재료 본연의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양념은 가급적 푸드프로세서나 믹서 대신 절구나 강판 등을 사용해 손으로 직접 갈아 만들기를 권한다. 발효 식품은 같은 재료를 같은 양 사용해도, 조리과정, 조리 도구를 달리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큰 차이가 온다.
늦은 저녁. 압력밥솥에 현미밥을 올린다. 드디어 나의 새 작업실에서 본격적인 요리를 시작하는 순간이다. 밥짓는 냄새가 나니, 아직은 황량한 듯 했던 이곳에도 생기가 돈다. 채소를 갈고, 잡곡과 섞어 유부에 채워 전골을 만들고, 무말랭이는 가볍게 씻고 전처리를 해 얼갈이와 함께 볶는다. 마지막으로는 마르쉐에서 사온 딜을 흩뿌려 나 답게 한식이지 양식인지 모를 반찬을 하나 올린다. 양이 강한 무말랭이와 음의 성질을 갖는 딜의 궁합이 조화롭다. (단, 딜은 너무 많이 뿌리지는 말것)
작업실에서 돌아오자마자 순무를 씻고 채수를 내려두고 잠이 들었다. 제철을 맞은 실한 순무를 손에 넣었으니 아침에는 이 맛을 온전히 느낄 스프를 만들어 먹을테다. 무청도 먹기 좋게 썰어 곁들여야지. 오트밀을 함께 넣으면 이 또한 조화롭겠구나. 오랜 만에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재료를 사용하니 매일 하는 레시피 구상도 새롭고 설렌다.
순무를 처음 접한 것은 일본에서 살던 시절이었던 듯하다. 무보다는 작아 무언가 손해보는 듯한 느낌이 들고, 무청은 어떻게 먹어야 할지 난감해 손을 대지 못하던 녀석. 대학 시절, 나를 딸처럼 아껴주시던 동네 카페 아주머니께서 밭에서 수확했다며 나누어주신 것이 계기였다. 인터넷을 뒤져 조림요리를 해먹었는데, 무와 닮은 생김새와는 달리, 무보다 훨씬 빨리 익어,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순무는 잘못 만든 감자조림마냥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쾌감 덕도 있어, 그 맛만큼은 만족스러웠다. 달콤하면서도 구수한 순무의 맛은 무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갖고 있다.
연근 토란포타주, 무말랭이 조림, 순무청 고명을 곁들인 현미밥으로 작업실에서 차린 한 끼. 얼마전 처음 시도해본 연근 포타주는 토란을 곁들여 업그레이드. 기관지 건강에 도움이 되는 연근을 사용하고 베이스로 사용하는 국물도 유제품(식물성) 사용을 줄여, 양의 성질을 더해 요즘 날씨에 맞는 레시피로 개선했다. 스프를 만들고 남은 무청은 톳과 함께 볶고 간장으로 간을 하고 졸여, 밥에 섞어 먹는 고명을 만든다. 순무청은 시금치 보다는 힘이 있고 맛도 구수한 한편, 청경채 보다는 여리고 감칠 맛이 있다. 데쳐서 나물로 먹어도 맛있고 볶아 먹어도 맛있는데, 볶는 편이 구수한 맛이 잘 살기에 볶아서 고명을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톳이나 김과 같은 해조류와 함께 볶으면 김자반 못지 않은 밥도둑이 된다.
이런 고명을 만들어 두면 냉장고가 황량할 때, 감사한 반찬이 되어준다. 찬밥과 함께 볶으면 간단하게 볶음밥을 만들 수도 있다. 재료를 미리 한번 볶아 두었기에 소량의 기름만을 추가하면 되어, 볶음밥을 만드는데도 느끼하지 않고 깔끔하게 만들 수 있다. 순무청 뿐만 아니라 무청, 당근 잎으로도 응용할 수 있다.
순무 한뿌리를 사서 세끼를 해결했는데, 음식물 쓰레기는 나오지 않았다. 껍질은 물론 뿌리 부분, 줄기와 잎까지 홀홀 털었다. 4호선 열차안에서 민폐를 끼치던 그 팔팔하던 순무의 생명력을 통째로 받아들인 셈이다. 무청의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 생명력도 느껴 보지 못했겠지. 무청을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우쭐한 마음도 들었지만, 생명력 넘치는 먹거리와 식사가 멀어지고 있는 현실에 또 한번 고민스러워 진다.
마크로비오틱이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마크로비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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