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연 Nov 14. 2019

올한해를 돌이키기보다는 어제저녁밥을 떠올리는 삶

11월 셋째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 밥상

 나의 요리작업실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간다. 집에 있던 조리도구들을 90%이상 작업실에 갖다두고 이곳에서 밥을 지어 먹기 시작하니, 미처 장만하지 못했던 조리도구, 그 밖의 소품들이 이제서야 생각나기 시작한다.이제는 제법 이 곳에서 요리를 하는 것이 익숙하다.

 이제 집에서 요리하는 횟수를 줄일 듯해, 가족들에게도 출퇴근 선언을 했다. 가는 길에 한살림에 들러 장을 보고, 작업실에서 점심을 지어 먹을수 있게끔 집에서 나가는 시간과 아침에 일어날 시간을 계산해, 우리 가족의 기상 시간을 앞당기겠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에도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과 다를 바없는 시간에 일어나곤 했지만, 강남구에서 마포구까지 출퇴근을 해야하니 더 일찍 일어나기로 한 것이다. 엄마는 남편과 두딸이 회사원으로 지내는 생활이 익숙했던 것인지 내심 신이난 듯했다. 혜연이가 ‘출근’을 해야하니 당신도 일찍 일어나라며 아빠에게도 전했다. 

 작업실 준비는 정신이 없다. 매일 산더미 같이 택배가 오고 이 것들을 푸르고 정리하느라 시간이 간다. 차가 없으니 어지간한 것들은 인터넷으로 주문해 택배를 받는데, 이 작업을 하며 각종 포장재와 비닐을 정리하다 보면 내가 쓰레기 생산자가 된듯해 조금 마음이 답답해진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는 법. 이렇게 주문을 하면 자가용을 끌고 사방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도 있다. 얼마전 종종 재래시장에서도 장을 본다는 나에게, ‘재래시장에서는 유기농 식재료를 구입할 수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렇다. 쿠킹클래스와 식당영업이 아닌 우리 가족을 위한 식재료는 재래 시장에서 살 때도 있다. 재래 시장에는 재래시장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물론 재래시장에서 유기농 식재료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만, 재래시장에서는 채소주머니만 잘 챙겨가면 비닐봉지 없이 장을 볼 수 있다. (한살림에서 장보면 비닐이 너무 많이 나온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상인 분과 꾸준히 거래를 할수도 있다. 유기농이 아니라고 해서, 관행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분이나 이를 유통하는 분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음과 양의 성질을 동시에 갖듯, 모든 것에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있으니, 선을 그으며 선악을 따지기 보다는 유연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편이다.

 작업실 정리를 마치고 늦은 저녁식사. 포타주를 만들고 남은 토란은 양파와 함께 파근하게 익혀 달콤한 조림을. 토란은 미끈한 음의 성질을 가지니 충분한 전처리를 하는 것이 포인트. 뿌리채소도 많으니 뿌리채소 조림과 뿌리채소 된장국을 끓였다. 작업실에 달콤한 향이 가득하다. 혼자 먹기에는 많으니 뿌리채소 된장국은 집으로 다시 챙겨왔다.

 수요일. 비가 온다는 소식에 조금 서둘러 출근 했으나, 장을 보고 나오니 이미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다. 양손에 든 짐에 우산을 들지 못해 조금은 비를 맞고 들어왔다. 

 수요일의 점심. 브로콜리 포타주는 겨울철에 맞게 레시피를 개선했다. 식물성 유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브로콜리와 궁합이 좋은 양의 재료들을 더해 만드니 온 몸이 뜨끈하다. 남은 뿌리채소로는 탄탄밥까지 만들었다. 무말랭이 식감을 기가 막히게 살렸다. 새로 장만한 냄비가 딱 내 감에 맞는다. 이 날의 음료는 삼년번차. 구수하다.

 비를 뚫고 장을 보러 작업실을 나섰다. 올해 마지막 수카라 채소가게가 열리는 날이었다. 주말에 마르쉐에서 산 순무 맛에 반해 찬우물농장 농부님께 미리 순무 부탁을 드렸다. 농부님은 전화로 어떤 요리를 할지, 수량을 얼마나 필요한지 등을 꼼꼼히 체크해주시고 봄 순무와 가을 순무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도 팁을 쏟아놓으셨다. 내년에는 같이 농사를 지어 보면 배우는게 더 많을텐데. 운전을 못하니 고양까지 다닐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수카라에 도착하니 농부님은 준비해온 순무를 보여주시고는 다발째 손에 쥐어주셨다. 함께 자란다 팜의 당근, 딜을 구입하고 수박무까지 얻어왔다. 주말에는 열차안에서 무청으로 민폐를 끼쳤는데 이 날도 무청으로 버스에서 약간의 민폐쟁이가 되었지만, 장바구니를 짊어진 어깨가 든든하다. 

 목요일. 식당영업 준비를 하는날. 수험생들이 수능 시험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시간에 집을 나섰다. 한살림 오픈시간에 맞춰 전철을 타기 위해 집을 나섰지만, 오늘은 조금 여유를 부려보고 싶다.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단풍을 즐기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기로.

 다음주는 베이킹클래스가 있어 식당영업을 쉬니, 나의 식당영업도 앞으로 2주만이 남았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문의를 주셔, 오후 쯤에는 이번주 금요일, 토요일 예약은 모두 마감되었다. 사실 조금 무리해서 예약을 받은 감도 있다. 과연 이 양을 나 혼자 다 만들 수 있을지...새로 장만한 거대한 조리도구들과 농부님의 채소들을 믿어보기로 한다.

 영업준비를 일단락내고 조금 늦은 저녁식사. 토란 포타주에 당근 조림을 넣어 스튜를 만들고, 애매하게 남은 당근은 소금에 버무리고 눌러둔뒤 기장을 버무려 잡곡샐러드로. 얼마전 만들고 남은 단단덮밥의 재료들도 얹어 깔끔하게 한끼를 해결했다. 새 작업실 조명과 나의 음식이 제법 궁합이 좋은 듯 하다.

 이 몇일, 이렇다할 이벤트도 없이, 그저 좋은 곳에서 장을 보고, 좋은 사람을 알아가고 내가 차린 밥을 먹으며 지냈는데, 돌아보니 제법 멋진 일상을 보내며 살고 있는 듯 하다. 괜시리 팍팍하게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요즘에는 맡은 바 임무를 책임감있게 잘 하는 것 보다, 멋진 일상을 보내고 웃으며 살아가는게 더 힘든 일이 아닌가 싶다.

 살아온 궤적을 남기고 그때그때의 감상을 기록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매일이 행복하고 즐거운 것도 아니고, 수입도 적다. 힘들고 지칠 때도 많은데, 막상 키보드를 펼쳐 지난 몇일간의 일상을 떠올리며 글을 쓰면, 힘들고 지쳤던 일도 감사하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일이 많다. 1년에 한번 한해를 돌아보는 대신, 조금더 자주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면 별거 아닌 것들도 소중하게 다가오는 건 아닐까 싶다. 한꺼번에 1년을 돌아보면 대단했던 사건들만 기억나지만 2~3일에 한번씩 돌아오면 어제 무엇을 어떻게 해먹었는지, 그것을 먹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마저도 떠오른다. 어제 저녁에 먹은 것을 떠올리는, 평범하기 그지 없어 자랑할 구석 하나 없을 수도 있지만, 후자의 삶이 나 답다. 매일의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듯해, 나의 삶은 다행이다.


마크로비오틱이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마크로비오틱.

팝업식당, 쿠킹클래스 관련 공지는 블로그에


매거진의 이전글 늬들이 순무 맛을 알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