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넷째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 밥상
매일같이 논현동에서 아현동 작업실로 출퇴근을 하며, 요즘에는 작업실 근처를 탐방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최근에는, 아현시장 뒷쪽에서 훌륭한 빵집을 발견. 당일 제작, 당일 판매를 원칙으로 하며, 천연발효에 대한 고집도 있는 듯하다. 매장안을 들어서니 바삭해보이는 바게트가 내 눈을 사로 잡는다. 마침, 전날부터 고수도 당겼겠다, 작업실에 장만해둔 템페도 있으니, 템페와 고수를 넣고 오늘 점심은 반미바게트를 먹어야 겠다. 냉큼 장바구니 바게트를 챙겨온다. 점심으로 먹을 반미 바게트 레시피를 구상하며, 총총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하지만 레시피를 구상해보니, 제대로 먹겠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이것저것 손을 벌렸다. 손을 대다 보니 사워크림, 사천소스, 즉석피클까지 만들었다. 반미 샌드위치는 원래 더운 지역에서 먹는 음식이니, 매콤한 소스와 기름진 재료, 향신료를 함께 사용해 만드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라에서 여름이 아닌 계절에 먹기에는 음성이 너무 강하다. 게다가, 시판 스리라차 소스, 마요네즈까지 사용할테니 음양의 문제를 떠나 첨가물과 감미료의 양이 허용 범위를 넘어선다.
마크로비오틱을 실천하며 사는 나에게 이런 것들이 용납될리 없다. 기름 가득한 마요네즈 대신 논오일 참깨사워크림을 만들었다. 두부마요네즈, 두유마요네즈를 만들더라도, 기름을 들이 부어 만든다면, 그저 비건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을 뿐 몸에 주는 부담을 줄였다고 볼 수는 없다. 기름 한방울 없이도 녹진하면서도 상큼한 이 참깨 사워크림은 반미 샌드위치에도 어울리고, 채소를 찍어먹거나 빵에 발라 먹어도 맛있다.
즉석 피클은 설탕 없이 만들기에, 일반 피클처럼 보관성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 대신 한번 먹을 양 만을 만들기에 재료를 한가득 손질할 필요가 없다. 그날 만들어서 그날 상큼하게 먹는데 의미가 있다. 날이 쌀쌀하니 오이나 샐러리 대신 우엉과 양파로 만드니 그 맛도 은은하다.
오랜만에 매콤새콤한 반미 샌드위치를 베어무니 맥주 생각이 절로 난다. 건강식이라면 맛은 포기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번 먹어보면 좋겠다. 건더기라고는 콩알만큼 들어있고, 시판 소스로 범벅을 한 반미 샌드위치보다 맛도 있고 든든하다. 게다가 세상 반미 샌드위치 중 가장 몸에 주는 부담이 적을 것이라 장담한다. 이제 슬슬 날이 추워지니 늦봄이나 초여름쯤 이 녀석은 다시 해먹어 보아야 겠다.
지난 1월 나의 마크로비오틱 첫걸음 클래스를 듣고, 이후 프로젝트 하다에서 나처럼 팝업식당을 했던 단비님이 작업실을 찾아주었다. 함께 그동안의 근황을 공유하고, 겨울의 계획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단비님 역시 엄선한 재료를 사용하며 비건으로 요리를 하기에, 나의 식당과 단비님의 식당을 모두 방문해본 손님도 적지 않았다. 우리 둘의 재료에 대한 고집은 많이 닮아 있어, 단비님과 함께 프로젝트 하다를 사용하던 시절, 프로젝트 하다의 냉장고는 각종 국산재료와 직접 만든 조미료로 가득할 정도였다. 위생관념도 닮아 있어, 청소 때문에 마찰을 빚은 적 또한 없으며, 따로 시간을 내어 함께 청소를 할 정도 였다.
재료를 고집하는 그녀답게, 유기농 청귤을 한아름 가져다 주었다. 어느덧 각종 감귤류를 손질해 저장하는 철이다. 이제 곧 유자가 나겠지. 얻어온 청귤은 반은 즙을 짜 얼음큐브에 담아 얼리고, 반은 편을 썰어 얼려두었다. 이런 감귤류는 소금에 절이곤 하는데, 청귤소금은 채소요리보다는 생선요리에 어울리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생선요리는 즐기지 않으니 즙을 내어 얼렸다.
청귤은 흔히들 설탕에 재워 청귤청을 만들지만, 감귤류와 감미료의 조합은 썩 좋지 못하다. 차라리 소금에 재우거나 나처럼 얼려두는 것이 낫다. 나는 생선요리는 만들지 않지만, 팁을 공유하자면 청귤은 꽁치처럼 비린 생선에 어울린다. 꽁치에 소금을 뿌려 구운 뒤, 간 무에 청귤즙, 간장을 곁들여 먹으면 비린 맛도 잡아주고 동물성 지방, 단백질 소화에도 도움이 된다. 청귤이 많이 들어왔을 때 미리 편을 썰어 얼려둔 뒤, 생선 요리를 할 때 한두조각 씩 사용하는 것도 좋다.
단비님이 청귤을 나누어 주고, 나는 고수를 나누어 주었다. 저녁식사로는 국물이 자작한 우엉 연근 조림을 만들고, 단비님에게 나누어주고 남은 고수를 얹어 청귤즙을 쪼륵. 동남아풍의 음식을 생각하며 만들기는 했지만, 실제로 만들어보니 놀라운 맛. 맵지 않은 똠얌꿍 같은 맛! 조만간 매콤하게 만들어 똠얌꿍 풍 스프를 만들어야지. 지금 갖고 있는 고수, 청귤이 나에게는 올해 마지막 스파이스가 될 듯 하다. 덕분에 늦은 가을에 동남아 맛을 보았지만 너희는 음이 강하니, 내년에 다시 만나야 겠다.
새 작업실에 식물 친구들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나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녀석은 뭐니뭐니 해도 에피잼 고사리. 들여놓은지 얼마되지 않아 홍콩에 다녀와 그 모습을 확인했더니 비실비실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흠뻑 물을 주고, 틈틈이 분무를 해주었더니 다시 살아났지만, 여전히 비실비실한 부분도 남아 있어 마음이 안타깝다.
20대 시절, 틈만 나면,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싶어 해외로 나갔다. 20대 시절을 해외에서 지냈기에,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게끔 살아야 한다는 마음도 있어, 집을 살 생각은 커녕 평생 월세에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나만한 안정지향 주의자도 없을 듯하다. 마음이 맞는 곳을 찾아 그 곳에서 평생을 보내도 좋다는 생각이다. 휴가마저도 새로운 곳을 찾기보다는 나에게 익숙한 곳을 몇 번이고 다시 찾는다. 작업실에 식물을 들여 놓고 보니, 이제는 이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라도 오래 작업실을 비우는 일을 만들지는 않을 듯 싶다. 한자리에 뿌리 박는 식물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나에게 맞는 환경, 내 마음이 편한 곳을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기에,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내 주변을 채우고, 내가 좋아하는 지역에 뿌리 박고 사는 것만으로도 삶은 그럭저럭 즐겁다는 것을 20대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지역, 마포구에 작업실을 얻고 좋아하는 식물들과 그림으로 공간을 채우며 지내고 있다. 금요일 밤에 불금을 불태우지 않고 타자타자 키보드를 두드리지만 내 삶은 즐겁다.
또 고사리가 비실비실해 보이길래, 오랜만에 흠뻑 물을 주었더니, 다시 이파리가 팔팔하다. 새로 들여온 으름덩굴과도 제법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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