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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연 Dec 31. 2018

행복한지는 모르겠지만 불평은 없다.

2018년 마지막주 마크로비오틱 비건 밥상

 갑자기 추워졌다. 푹신한 부츠를 신어도 발이 시릴 정도로. 이런 추위를 뚫고, 종무식, 신년 등 연휴기간일텐데도 이번주에는 역대급으로 많은 손님들이 찾아주셨다.

이번주 팝업식당 오늘의 메뉴

-현미밥과 현미죽 빵

-당근 포타주

-연두부 크림 그라탕

-무말랭이와 해초의 겨울 샐러드

-깍두기

-얼갈이와 목이버섯, 들깨소스

 당근 포타주는 언제나 인기있는 녀석. 나의 글에서도 여러번 등장했다. 가을 시즌 문토 나와 만나는 주방에서 함께 만들었을 때에도 인기였고, 새로운 시즌에서도 함께 만들었다. 새로운 시즌 모임에서는 아기들 이유식으로도 좋겠다는 꿀팁까지 있었다. 

 샐러드이기는 하지만 양의 성질을 살려 만든 무말랭이와 해초의 겨울 샐러드는 알배추까지 채썰어 넣으니 겨울 빛이 완연하다. 깍두기와 이 녀석 덕분에 이번 주말 나의 팝업식당에서는 손님들의 오독오독 무 씹는 소리가 퍼졌다. 


 공간이 생기니,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많다. 10년전, 교토에서 만나 지금까지도 얼굴을 보며 지내는 대학교 선배들이 나의 팝업식당을 찾아주었다. 자취를 갓 시작해, 욕심은 많지만 참으로 재주가 없던 나의 요리를 구박하면서도 잘 먹어주던 선배들. 김치찌개를 끓이는데 왜 스팸을 넣으며 왜 멸치육수를 넣었냐며 그리도 구박했다. 하지만 다 맞는 말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공간을 찾으며 혜연이 요리는 늘었으려나 걱정을 하며 왔다나. 다행히 입맛이 까다로운 선배들에게 반전을 선사하며 합격점을 받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짧지는 않았나 보다.

사이드 메뉴인 알배추 메밀전과 맥주까지 야무지게 챙겨먹고 갔다.

 햇살이 늘어지는 오후 세시 경의 상수동. 햇살도 따뜻하고 배도 부르니 선배들은 하나 둘 테이블에 늘어진다. 겨울철, 함께 선배집에 모여 앉아 고타츠를 틀어놓은 채 나베를 먹고, TV를 보던 때와 다를 바가 없어 정겹다. 19살때 만난 선배들이지만 내가 서른 앞자락에 서있어도 다들 변함없다. 하지만, 내가 쉰이 넘어도 병아리라고 부르겠다더니 이제 병아리는 어려운가 보다. 

 그렇게 이번주에는 나의 공간에서 늘어져(?) 있다 가던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된 듯해 좋다. 집이 아니지만 편하게 쉴수 있고, 주인장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곳. 그렇게 유난히 손님들과의 대화도, 손님들과 보내는 시간도 많았던 지난주 영업을 마치고 그와 동시에 2018년 마지막 영업을 마쳤다.


 새해 목표를 설정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지난 한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짧게나마 글로 남겨놓는 것이 매해의 행사가 되었다.


 모든것이 운과 기회로 진행된 감사한 한 해였다. 무서울 정도로 많은 것들이 계획한대로 진행되었다. 내가 애써 계획에 맞춘것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를 얻어 진행된 거나 다름없어 무섭다. 회사를 나오기 전, 직장인 답게 엑셀을 펼치고, 내년 목표로 하고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 올해 안에 반드시 필요한 일과 그것을 진행하기 위해 모니터링할 KPI와 목표치를 설정했다. 모든 KPI와 목표치를 달성한 것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은 해낸거나 다름없는 결과를 얻었다. 올해 안에 한국에서도 마크로비오틱 클래스를 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일이었는데, 올해 안에 1월 클래스 모집을 완료했다. 10월쯤만해도 올해 안에는 어렵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올해 안에 모집을 한것 만으로도 반전이다. 우연한 기회에 문토를 만나, 많은 사람들의 요리와 대화를 주도하는 경험을 하고, 또 우연한 기회에 프로젝트 하다를 만나, 내가 주인장으로서 쿠킹클래스를 개최할수 있게 되었다. 만난 모든 사람들, 나에게 주어졌던 모든 기회와 환경에 감사하다. 작년, 일본을 떠나올때에도 같은 마음이었다.


 얼마전, 오랜만에 예전직장 동료와 점심을 먹던 도중, 문득 ‘요즘 행복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았다. 조금 당황했다. 행복한지는 모르겠지만 불평은 없다. 딱히 원하는 것도 없으면서 불평하고 타협하며 살던 20대의 나와 작별한 듯해 기쁘다.


 회사를 나오고 생각보다 나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늘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고, 오히려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하던 시간보다 일찍 주방에 서 칼을 쥐었다. 그렇게 회사라는 조직은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좌우할 만큼 큰 요소가 아니었다. 다만, 회사를 다니던 시절보다, 좋아하는 것들로 더 많이 내 주변을 채워 지냈다 (그렇다고 회사 일이나 회사를 다니는 삶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요리, 요가, 독서, 글, 소중한 사람들. 나의 생활은 이렇게 심플해졌다. 수입은 줄었지만, 나의 생활에 불만이나 불평은 없었다. 불평이 없어지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우선순위를 알게 된것을 보니 나의 20대는 보람찼다. 30대. 앞으로 어떤 일들이 다가올지는 모르겠지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살아가면 지금처럼 불평없이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지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2018년을 마무리해보려고 한다.


 부족한 글 솜씨지만 글을 읽어주신 분들. 

 부족한 요리, 사진 솜씨지만 밥상 사진을 둘러보아 주신 분들.

 혼자 하던 요리, 혼자 쓰던 글을 나누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2019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마크로비오틱이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마크로비오틱.

조각글과 팝업식당운영 관련 공지는 블로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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