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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연 Jan 05. 2019

퇴사 후 얻은 것은 워라밸이 아니었다.

2019년 첫째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 밥상

새해가 밝았다.

 2018년을 마무리 지으며 차린 술상. 연두부 크림과 우메보시를 바른 브루스케타와 연두부 크림을 바르고 드라이토마토를 얹은 브루스케타, 그리고 시원한 라거 한잔. 요리를 하다가 요가를 가고, 글을 쓰다가 어둑한 방에서 책을 읽으며 맥주 한잔을 마셨다. 2018년 12월 31일처럼 2018년은 조금 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 보냈다. 훌륭한 한 해였다. 

 새해를 맞이하며 나의 집밥은 더욱 간소해졌다. 1월에 클래스를 앞두고 있다. 앞으로도 클래스를 자주 가지고 싶다. 어떤 분들이 오실지는 모르겠지만, 건강과 식생활에 대한 상담을 많이 받을 것 만큼은 분명하다. 클래스를 하며 많은 분들과 요리를 하고, 중용에 가까운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요리를 주도하는 내가 바른 입맛과 컨디션을 갖고 있어야 한다. 2018년에 나 혼자 마크로비오틱을 심화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2019년에는 내가 심화한 것을 나누기 위해 나를 단련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렇게 2019년 첫째주에는 현미밥에 깨소금, 된장국만을 간단하게 곁들이거나, 현미죽에 우메보시만을 곁들인, 마크로비오틱에서 말하는 7호식(곡물만으로 차리는 식단) 또는 6호식(곡물에 된장국, 소량의 절임 반찬으로 차리는 식단)에 가까운 식사를 주로 했다. 

 이렇게 심심해 보이는 것만을 4,5일 먹은 것은 아니다. 내가 팝업식당 ‘오늘’ 을 빌린 공간, 프로젝트 하다에는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다른 팝업식당이 운영된다. 목금 팝업식당은 다양한 스파이스로 주로 비건커리를 만드는 ‘지구커리’. 지난주 출근해 냉장고를 열어보니, 지구커리의 주인장께서 남겨주신 커리가 있다. 우리는 이렇게 때로는 커리를, 때로는 깍두기를 나누어 가며 사이좋게 한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 늙은호박과 캐슈넛으로 만들어 놀랍도록 부드러운 맛의 커리. 수수하던 나의 밥상에 즐거운 스파이스가 되어 주었다.

 수요일에는 프로젝트 하다에서 만난 세명이 모며 콜라비로 여러가지 저장식품을 만들었다. 하다를 운영하는 다운님이 지인을 통해 구매한 제주산 유기농 콜라비. 판매되지 못하고 남아있던 ‘파찌’ 채소라는데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실하다. 다운님은 10개도 넘는 파찌 콜라비를 혼자 샀고, 우리는 이 콜라비로 함께 피클과 깍두기를 만들었다. 서로의 재료와 밀폐용기, 콜라비를 나누며 그렇게 함께 만들고, 시간도 함께 나눴다.

 콜라비를 썰고, 절이다 보니 어느덧 점심을 넘길 것만 같은 시간. 다운님과 함께 근처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단열을 하기 위해 비닐을 사러 다녀오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저 편한것에 익숙해지는 삶, 배달앱과 일회용품 사용양에 대한 이야기, 우리의 2,30대 이야기, 나의 두번째 팝업식당(과연 실현될 것인가) 이야기 등. 매서운 겨울 바람에 둘다 후드를 뒤집어 쓰고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근처 빵집에 들러 다운님이 호밀빵 한 토막을 샀고 이 빵의 반을 나에게 나누어 주셨다.

상수역 근처의 채식식당에서 비건메뉴를 나누어 먹었다.

 연이은 연말모임에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도 많아서 그런지, 최근 퇴사 후의 삶의 질, 특히 ‘워라밸’에 대해 질문을 받는 일이 잦다. 주로 집에서 일을 하며 ‘출근’을 하는 일이 적은 나를 보며 아주 만족스러운 ‘워라밸’을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이 현실. 직장생활을 하던 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에 일어나고 사무실에서 일을 하던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요리를 시작한다. 팀으로 나눠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기획(메뉴 구상, 커리큘럼 기획 등), 마케팅(남들은 논다고 생각하는 SNS 활동), 매출 및 이윤 관리, 그 밖의 잡다한 일(재료주문, 레시피 정리, 클래스 자료작성, 새로운 레시피 테스트, 재고 관리, 설거지 등)까지 혼자 하기 때문에 나의 하루는 꽤나 꽉 차 있다. 그래도 지금 당장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좋아하고 즐거워 하는 것을 일로 삼았기 때문이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건전하지는 못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 해도 한가지에만 집중하다가 그것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면, 회사에서 실수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큰 절망에 빠질 수 있다. 또한, 눈과 귀가 새로운 자극에서 멀어져 영감이 고갈되기도 한다. 앞뒤 가리지 않고 금방 몰두하는 나를 잘 알기에, 꾸준히 요가와 독서모임을 하며 리프레쉬도 하고 외부자극을 얻고 있다.


 퇴사 후, 내 삶의 질을 높여준 것은 많은 사람들이 기대한 ‘워라밸’이 아닌,  ‘사람’이었다. 퇴사 전에도 식탁을 통해 환경과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삶을 추구하며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꾸준히 갖고 있었다. 하지만, 출퇴근, 업무시간, 취미에 조각조각 나누어 쓰는 것 만으로도 나의 하루에 주어진 24시간은 너무나 짧았기에, 일과는 다른 관심 분야를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은 사치였다. 이런 나에게 퇴사 후, 오롯이 관심사에 쏟아부을 시간이 생겼고, 무서울 정도로 빠른 시간내에 운과 기회로 같은 취향과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과의 시간은 나에게 책에서는 얻을 수 없던 정보와 자극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만난 사람들은 ‘Give and Take’ 또는 ‘이해 관계’를 넘어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2018년 한해동안 유독, ‘사람복 하나는 타고 났다’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조용한 겨울날 아침. 얻어온 호밀빵에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돼지감자 포타주를 곁들여 먹으며, 내 삶의 질을 높여준 요소에 대해 생각했다. 식탁위에서는 전날 함께 만든 콜라비 깍두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마크로비오틱이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마크로비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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