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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연 Feb 21. 2019

우수(雨水). 장을 담그며 할머니를 생각하다.

2월 넷째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 밥상

 클래스와 식당영업으로 꽉채웠던 2월 셋째주가 지났다. 넷째주가 되니 강철체력이라 자부하던 내 몸도 휴식을 원한다.

 평소보다 이틀을 더 출근할 뿐이라 생각했는데 바로 몸에 신호가 온다. 무언가에 몰두하면 멈출줄을 모르는 안좋은 버릇이 또 나왔다. 스스로의 몸에 집중하자는 이야기를 수업에서 했지만 정작 내 몸을 뒷전으로 하고 있었나 보다. 오랜만에 맞이한 나의 휴일 월요일. 잠에서 깨어보니 몸에 피로가 쌓였다. 몸에 신호가 오는 듯해 일요일 저녁부터 덜 먹고 있었다. 배가 고파질때까지 기다리고 점심이 되어서야 오랜만에 맞이한 끼니. 현미죽에 연근톳조림. 단호박팥조림을 곁들였다. 단호박이 맛있는 시기는 아니지만 다리가 붓고 화장실활동이 이상한 것이 신경쓰여 만든 단호박 팥조림. 과하게 이완된 몸을 다잡아주며 기본식 반찬으로 곁들이기 좋은 연근 톳조림. 기본적인 것들에 충실한 메뉴들로 식당영업을 하고 클래스를 하기에, 애써 사러 나가지 않아도 재료가 모두 집에 있고 심지어 연근톳조림은 식당영업후 남은 것이 있었다. 몸이 지쳤을 때 필요한 것들을 늘 주변에 두는 일을 하며 살고 있어 다행이다. 

 고기도 먹지 않고 어떻게 힘을 내냐 묻지만, 이처럼 밥으로 힘을 낸다. 지쳐도 이것저것 요령까지 피워가며. 식당 영업 후 남은 밤콩은 콩조림이 되고, 애매하게 남은 냉이와 미역은 함께 무쳐낸다. 미역과 가볍게 데친 냉이로 만드는 반찬은 이 계절 냉이를 꾸밈없이 즐길 수 있는 메뉴. 남은 것들로도 순식간에 한끼를 차려내는 재주가 늘고 있다.


 우수(雨水). 그리고 정월대보름을 맞았다. 잡곡밥과 묵나물을 먹는 정월대보름. 월요일에 쉬느라, 정월대보름 준비가 부족했다. 하지만 서둘러 마지막 남은 말린 취나물로 정월대보름 행사를 치루었다. 노지 채소가 부족한 시기에 귀한 식재료가 되었을 묵나물. 게다가 음의 계절에 필요한 양의 조리를 더한 재료이다. 이처럼 마크로비오틱을 배우며 우리의 식문화를 다시 바라보고 그 지혜에 감탄하곤 한다.

 묵나물 조리법을 어딘가에서 배워본적은 없다. 하지만 마크로비오틱의 음양을 고려해 만드니 기름으로 범벅되지도, 빳빳하지도 않으며 나물 향은 그대로 살아있는 묵나물 볶음을 만들 수 있다. 음은 양을 끌어당기고 양은 음을 끌어당기는 이론만 잘 이해하면 조금 더 주방과 친해질 수 있다. 할머니도 우거지로 나물을 만들어주셨다. 할머니가 만든 나물과 내가 만든 나물로 차리는 정월 대보름 밥상. 어릴적 놀이터에서 흙장난 하다 온 코찔찔이 간식을 만들어주실 때에는 이런날이 올거라 생각은 하셨을까.


 정월대보름 밥상으로 배를 채웠으니 이 시기에 해야할 일을 하러 나가본다. 문토에서 인연이 된 송보라 쉐프님의 소개로 서울시와 고은정 선생님의 ‘장하다 내인생’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우수쯤에 장을 담그면 한달 반정도가 지난 청명과 곡우 사이에 장을 가를 수 있다. 그 때부터 발효하기 적당한 날씨가 되는데다가 그 전날 내린 눈까지 피했으니 올해에는 최상의 시기에 장을 담글 수 있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장독대가 있는 집을 찾기가 어려운 요즘.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시의 주도로 장독대없애기 운동까지 진행되었다. 이런 요즘 전원주택도 아닌 다가구 주택에서 옥상에 장독대를 놓고 우리 할머니는 장을 담그신다. 덕분에 된장, 한식간장은 사먹는 일이 드물었고, 장맛에 까다로운 손녀로 자라났다. 나와 함께 우리 집도 자라왔을 것. 장을 담그는 집에는 좋은 균이 살고, 이 균도 또 다시 좋은 장을 만든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우리집은 할머니의 진두지휘하에 서울답지 않게 좋은 균을 가진 집으로 자라왔다. 이 집의 장독대와 이 집의 균을 할머니만큼 잘 이어갈 수 있을까. 어깨가 무겁다.


 하루동안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 아침에는 장을 담그고 저녁에는 합정동 문토라운지에 모여 마크로비오틱 요리 모임 ‘나와 만나는 주방’을 진행했다. 이번 모임의 메뉴들은 리얼 슬로푸드. 하지만 바쁜 직장인들이 많기에 크게 손이 가지는 않는 것들.

-압력없이 냄비로 지은 현미밥

-연근톳조림과 연근톳세발나물무침

-단호박팥조림

-미나리메밀전

-생강향 봄동유부무침

-유부주머니 나베


 가을부터 진행해온 ‘나와 만나는 주방’. 문토의 식탁에도 드디어 세발나물, 미나리, 봄동과 같은 봄의 푸르름이 보인다. 냉이가 없어 아쉽지만, 조금더 주방과 친해질 시간이 필요한 멤버들도 있기에 조금 더 친해지기 편한 재료들을 준비해 보았다. 


 ‘나와 만나는 주방’에서는 주방을 통해 라이프스타일에 변화를 줄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이번에도 오랜만에 만난 멤버들과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유쾌한 지혜를 나누었다. 이처럼 ‘나와 만나는 주방’은 쿠킹클래스는 아니다. 같은 고민과 같은 취향을 함께 나누며, 자연스러운 먹거리를 통해 나에게 집중하는 연습을 해보는 자리일뿐. 나는 그저 함께 만들 요리의 레시피를 준비하고, 대화를 거든다. 요리와 주방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또래들이 요리와 대화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 보도록 도와드리는 것은 쿠킹클래스와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멤버들과 늦은 저녁식사를 나누며 새로운 기쁨을 맛보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기회가 생기기도 사라지기도 하는 프리랜서의 삶. 쏟아지는 기회에 휩쓸리다 보면 어떤 마음으로 프리랜서가 되었는지를 잊고 살기 쉽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조직에서 빠져 나왔지만, 어느 순간 왠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기 쉽다.


  운 좋게도 ‘이런 일을 한다면 의미를 느끼겠다’ 고 생각하던 일들이 빠른 시기에 기회로 주어졌다. 회사를 나와 쿠킹클래스, 식당, 모임리더 등 다양한 일을 하며 지내고 있지만 어떤 일을 하든, 누군가 나와 식탁을 통해 새로운 자신의 세계와 만나기를 기대하며 일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렇게 많은 기회가 주어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에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를 다잡아줄 기준 한가지는 생긴 듯 하다. 늦은 밤 올림픽대로를 타며 잠시 생각에 젖었다.



마크로비오틱이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마크로비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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