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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연 Feb 26. 2019

상수동에서 다시 논현동으로

2월 마지막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 밥상

 봄처럼 날이 따뜻하다. 주방에서 발이 시려워 푹신한 부츠에 두툼한 멜빵바지를 입고 일하던 3개월. 팝업식당 마지막 영업을 하던 날, 수고했다고 얘기라도 해주는 듯 날이 좋았다.

 

 팝업식당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에는, 12월과 1월 두달만을 예정했지만 욕심과 즐거움에 한달을 더 하기로 했다. 그리고 약속한 2월 마지막주. 감사하게도, 앞으로도 계속 팝업식당을 운영할 생각은 없냐는 질문도 종종 받았지만, 당분간 팝업식당 운영은 어렵게 되었다. 3,4월에는 도쿄에서 마크로비오틱 공부를 하는데 조금 더 집중하고 싶었다. 줄곧 도쿄에 가있는 것은 아니지만, 매주 팝업식당을 운영하는 것은 부담이었다. 더 좋은 음식으로 손님들을 만나고 더 좋은 커리큘럼으로 쿠킹클래스를 진행하기 위한 재정비의 시간 또한 필요했다. 음 있으면 양 있고, 양 있으면 음 있는 것처럼. 앞만 보고 달리기 보다는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하지만 영영 손님들과 수강생분들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명확한 시기를 약속하기 어려울 뿐, 다시 식당으로든 클래스로든 돌아올 것 만큼은 확실하다. 그러기에, 손님들에게도 수강생분들에게도 잠시 쉬어갈 뿐이니, 뜨거운 안녕을 하지는 말아달라 부탁드렸다. 나 역시 편하게 식사를 내고, 여느때와 다를 바 없이 수업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렇게 맞이한 2월 마지막 주의 마크로비오틱 비건 식탁 오늘의 메뉴

-현미밥

-봄동과 두부 된장국

-연두부 크림 그라탕

-생강향 시금치와 유부

-미나리향 깍두기

-냉이와 사과 샐러드

 무, 배추, 무말랭이가 자주 등장하던 플레이트에 봄빛이 늘었다. 봄이 오고 있는 이 계절 플레이트에 냉이와 봄동을 담고 싶었다. 

 냉이는 손이 많이 간다. 가을 겨울에는 우엉 때문에, 봄에는 냉이 때문에 손끝이 흙빛이 되곤 한다. 하지만 네일아트를 한 손 보다, 흙때가 탄 내 손이 더 정겹다. 이렇게 손질한 냉이는 소금에 살짝 버무린 사과와 함께 샐러드가 되었다. 길거나 두툼한 냉이 뿌리는 샐러드로 손님 상에 오르기에는 다소 대담하기에, 잘게 다지고 간장 등과 졸여 드레싱으로 만들어 보았다. 아직은 생채소 샐러드를 먹기에는 이른 계절. 냉이는 가볍게 데치고, 사과는 소금에 살짝 버무려두어 음의 성질을 덜어낸 봄철 샐러드를 내보았다. 특유의 쌉쌀한 맛 때문에 어른입맛을 지닌 손님들에게만 반응이 좋을까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도 그라탕을 뛰어넘는 호평을 받았다.

 손님들이 자리를 비운 점심 브레이크 타임. 뒤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쉬며, 오후의 상수동의 햇살을 즐겨 본다. 서쪽으로 창이 나있어 늦은 오후면 사람을 졸리게까지 하는 햇살이 들어오던 프로젝트 하다. 12월, 1월에는 3시쯤 햇살이 가장 좋았다. 이 햇살이 2월이 되니 4시쯤 들어오는 듯하다. 이 짧은 세달동안에도 햇살을 받는 시간이 바뀐다. 내가 이 곳에 돌아올 즈음에는 더 늦은 시간에 이 햇살을 받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며 잠시 나른한 햇살을 즐겨보았다.

 어느샌가부터 예약손님들이 많아졌다. 예약손님이 많으면 전기밥솥을 사용하지 않고 압력밥솥이나 냄비에 밥을 짓는다. 봄이 왔다 싶어 얇은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다가 감기에 걸리기도 쉬운 요즘. 예약해주신 손님들을 위해 양의 성질을 살린 압력밥을 지었다. 자주 찾아주시던 손님들, 내 수업을 찾아주었던 최연소 수강생 등. 많은 손님들이 이 2월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드시러 와주셨다. 손님들은 내가 차린 식사를 드시고, 바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마감 직전까지 나와 대화를 나누고는 자리를 뜨셨다. 어색해서 손님들과 대화도 좀처럼 나누지 못하던 내가 이제는 제법 ‘주인장’ 같은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2월 마지막 영업의 감상에 젖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바로 다음날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있었다.

  1월과 마찬가지로 2월의 마지막수업은 체질을 알아보고 체질, 컨디션에 따른 식단구성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그리고는 다시 기본 중의 기본으로 돌아오기에 마지막 수업의 식사는 유난히 심플하고 소박하다. 뿌리채소로 만든 된장국과 우엉당근조림, 브로콜리 참깨두부무침까지.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주식을 알아보기 위해 함께 만드는 현미밥빵을 곁들인다.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다들 놀라는 리얼 슬로푸드 마크로비오틱. 은근한 약불에서 오래 짓는 밥, 반찬에 고개를 내젓기도 한다. 하지만 조리를 통해 변해가는 채소의 향, 빛을 오감으로 느끼시길 바랐다. 그 시간속에서 재료, 그리고 주방과 마주하며 먹거리를 만들어 내고 내 몸에 귀 기울인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바랐다.


 하루가 멀다하고 건강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실천해보기를 권하는 다양한 건강식정보도 끊임없이 들려온다. 하지만 실천해보겠다는 본인의 의지, 계기 없이 그저 떠밀리듯 실천해서는, 즐거운 라이프스타일로 자리잡히지 않을 뿐더러,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때문에도 마크로비오틱을 사랑하지만, 마크로비오틱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크로비오틱이 어떤 것인지 숨김없이 보여드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마크로비오틱을 느끼고 가실 수 있게끔 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시간을 통해 그동안의 주방에서의 시간과 식생활을 돌이켜보게 되었다는 기쁜 말씀도 들을 수 있었다. 때로는 빠르고 편한 것에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빠르고 편한 삶에서 잊고 있던 내 몸의 소리, 자연스러운 것들과의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내 몸, 자연스러운 먹거리들과 대화하며 조금씩 조금씩 라이프스타일도 바뀌어 나간다. 그러기에 3회에 걸친 수업을 통해 식생활이 환골탈태하기를 바란다면 내 수업에는 오지 않는 것이 좋다. 평생을 들여 식생활과 라이프스타일 전체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 마크로비오틱이다. 마지막 수업에서는 이 이야기를 하며 유독 ‘평생사업’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그리고 쉼의 시간이 왔다. 수업이 끝나고 짐을 정리해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해 본다. 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챙겨보니 하루만에 가져갈 수 있을 정도의 짐만이 나왔다. 컴팩트하게 살아서도 그렇지만, 필요한 도구와 식기를 모두 갖춘 프로젝트 하다 덕분이기도 했다. 프로젝트 하다는 인테리어나 각종 소품이 나, 그리고 내가 내는 음식과 무척 잘 어울렸다. 덕분에 나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이곳을 방문하고는, ‘원래 이곳에 있던 사람 같다’ 라는 말을 많이들 했다. 잠깐의 휴식이겠지만, 스스로도 나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정든 이 곳을 비우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주말 없이 살던 3개월. 나에게 다시 찾아올 주말이 잠시 어색하겠지만, 잠시나마 그 시간을 즐겨보려 한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은 나의 마크로비오틱 라이프는 아니기에.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마크로비오틱. 나도 즐기고 더 많은 사람들과 즐기기 위해 정든 곳의 불을 끄고 문을 걸고 나왔다.


마크로비오틱이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마크로비오틱.

조각글과 팝업식당,클래스 관련 공지는 블로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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