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서

by 혜윰

촉촉하게 젖어 있는 공기의 냄새를 깊게 들이마신다. 밴쿠버(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이하 BC주)의 날씨는 일 년의 절반 정도 촉촉하게 젖어 있다. 한창 이삿짐을 나르다가 무심코 멀리 보이는 숲을 쳐다본다. 어디를 가도 일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무언가 마음 안에 평온이 있다. 그간 한국에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몸은 많이 지쳐있었지만 무언가 머릿속은 깨끗한 느낌이다. 그간 나를 위해 온전히 지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치료 약처럼 단지 그 공간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이렇게 효과가 온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지금은 온전히 나를 위해 살고 있다. 일이 있음 일을 하고 없는 날은 공원으로 바다로 산책하러 다니고 사진을 찍고 있다. 월급은 그리 많진 않지만 생활하기에는 더없이 충분했고, 일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팁을 받는 일이 종종 있어 나름 쏠쏠했다. 어느 순간부터 원래 이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나는 어느새 이 생활에 스며들어 있었다.


밴쿠버에 도착하고 2주가 흐른 뒤 나는 일을 구할 수 있었다. 한인이 많이 사는 동네여서 그런지 한인 커뮤니티가 어느 정도 잘 형성되어있어 그곳에서 일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 중 몇 가지 안에서 고를 수 있었는데, 그중 내 눈에 띈 건 이삿짐이었다. 일은 힘들겠지만 단순하게 생각했다. 내가 지출을 최소한으로 하고 도시 구경을 다양하게 많이 볼 수 있는 기회는 이삿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간단한 인터뷰를 마치고 바로 일할 수 있었다. 보통 이삿짐 대상은 한국인들이었지만 중간중간 현지인들의 이삿짐도 종종 하곤 했다.


이른 아침 스카이트레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구름이 나지막하게 내려 앉아있다. 4월의 어느 날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고 일을 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씁쓸하지만 고소한 커피 향이 나의 기억을 마구 헤집고 다닌다. 오늘은 같은 날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낮잠이나 퍼질러 자다가 저녁쯤 친구와 만나 파전에 막걸리를 먹으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이 떠들어 대는 수다가 더없이 그리운 날이다.


일이 끝났지만 비는 아직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곧바로 집으로 가야 하지만 그날따라 왠지 모르게 걷고 싶었다.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이대론 들어가기 아쉬울 때, 숲속을 걸으니 공기가 더없이 깨끗하게 느껴진다. 무언가 비는 오지만 습하지 않아 더욱 상쾌한 느낌? 그래서 그런지 걷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 공원을 산책하다 쉽사리 만날 수 있었던 다람쥐들이나 새들의 소리는 빗소리 뒤로 숨어 고요하고 적막함 만이 공원을 채웠다. 사람도 별로 없는 것이 오늘은 내가 이곳을 통째로 임대한 느낌이다. 이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으니 마음껏 즐겨야겠다. 아마 한국에 있었다면 친구들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면서 별것 아닌 것들로 열정적으로 얘기하면서 떠들고, 다음날 숙취로 고통받다 결국 어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도 못한 채 해장할 생각만 했을 텐데 이곳에 오니 술 생각도 나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내 시간을 나에게 쓰는 기분이 들어 정신이 더욱 건강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오솔길들이 점점 어둠 속에 지워지고 있을 때쯤 나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살면서 비에 대해 딱히 많은 생각을 하진 않았다. 친한 형님 같은 경우는 빗소리가 좋아 가끔 비가 오는 날이면 차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빗방울이 차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청할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나에겐 전혀 그런 감정은 없었다. 비가 오면 비 오네? 하며 그냥 무심결에 넘겨 버리곤 했는데 여기 와서는 좀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 커피 향에 잊혔던 기억들이 살아나고 빗속에서 일하면서 스무 살의 풋풋했던 날의 내가 떠오르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자니 나에 대해 조금 더 깊고 진중하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살아 온 날들 하루하루가 소중하지만 그 중 머릿속에 기억을 남긴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나이가 들어 간다는 건 기억하는 일보다 잊혀가는 것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고 또 그중에서 잊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지만 기억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쩜 기억하는 것조차 노력하지 않으면 쉽사리 내 곁을 떠나 과거 속 서랍장 깊숙이 들어가 다시 꺼내 보기도 힘들어진다. 오늘 이렇게 걸었던 날을 나는 몇 해가 지난 후 기억 속에서 꺼내 놓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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