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그곳이 왜 생각이 났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갑자기 나는 미친 듯이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원래는 한국 돌아가기 전 로키나 다녀올 요량이었지만 급히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항공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금액이 저렴해 더욱 가고 싶어졌다. 아마 이번이 아니면 나는 다시는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예산이 많지 않아 제일 저렴한 비행기표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 간의 심사숙고한 검색 결과 제일 저렴한 항공편을 찾을 수 있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출발 - 페루 쿠스코 도착 왕복 티켓] 그렇게 나는 이 비행기를 타고 가야라는 마음을 먹고 예약을 하려 했는데 왕복 티켓 중에 쿠스코까지 가는 비행시간이 27시간에 경유가 3번이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돌아올 때는 13시간 비행에 경유 1번 정말 북극과 남극처럼 끝과 끝에 있던 시간이었다. 갈 때는 갈 수 있는 최대한 긴 시간에 올 때는 최대한 빠른 시간이라니... 하지만 나는 큰 고민하지 않고 바로 예매했다.
몸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다. 도대체 나는 지금 몇 시간을 씻지 못한 것일까? 출발한 지 한참이나 된 것 같은데 아직 갈 길이 구만리라니 무작정 예매했던 내 어설픔에 다시 한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저렴한 티켓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몸이야 조금 고생하면 뭐 어때? 라는 심산이었는데, 몸이 점점 굳어서 공항 구석 어귀에 동상으로 서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뻣뻣해 있다. 경유할 때 제일 힘든 건 역시 대기 시간이다. 2곳의 경유지에서 각각 7시간 38분, 8시간 57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원치 않는 공항 노숙을 하다 보니 잠도 안 오고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만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 한번 꿈에 다다르기는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소심하게 깨닫게 된다. 점점 목적지에 가까워진다는 설렘과 함께 찾아온 몸의 변화, 내 신체가 점점 석화되어가는 경험을 함께하고 있다.
장시간 비행도 힘들지만 그래도 비행기를 타면 이동한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냥저냥 견디긴 하는데 무작정 공항에서의 대기는 사람을 멍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어쩌면 나는 고난과 고통을 몸소 체험하는 참된 여행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계 일주나 오지 여행가의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겠지만, 그래도 힘든 건 어쩔 수가 없다. 밤늦은 시간의 공항 구석에는 나와 비슷한 행색을 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가끔 눈이라도 마주치려면 서로를 격려하는 눈빛으로 응원을 보내곤 한다.
리마(Lima)에서 드디어 쿠스코(Cuzco)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도착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벌써 들떠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사람 마음이 이토록 간사한지 금방 깨닫게 되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는 대기시간에 지쳐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것처럼 느꼈는데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 이내 마음이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이 된 것마냥 가벼울 줄이야.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그래도 좋은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그렇게 비행기 안에서 혼자 별별 잡생각을 다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비행기에서 갑자기 안내 방송이 나왔다. 방송하는 분은 이 비행기의 기장이었고,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어서 대충 눈치껏 있었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 나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일제히 왼쪽 창가 쪽으로 눈을 돌렸고, 나 역시 사람들이 움직이는 대로 조그마한 창가에 얼굴을 묻고 밖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눈 덮인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침 햇살에 부서지듯 하얗게 빛나던 산봉우리를 보고 있자니 눈이 부실 정도로 시리고 아름다웠다. 아마도 기장님은 비행기가 크지 않아 가는 길에 안데스산맥의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만 보시기 아까웠는지 비행기에 같이 있던 우리에게 선물을 준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27시간 동안 3개의 도시를 거쳐서야 쿠스코 공항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 고산지대에 위치한 작은 공항이었지만 여행자와 현지 사람들로 인해 북적였다. 크게 공기를 들이마셔 본다. 공항은 다양한 향기를 품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그들의 삶의 향기와 그곳을 찾는 여행자들이 남기고 흔적들이 뒤섞여 공항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의 향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