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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Feb 21. 2019

겨울 한라산이 보고싶어, 다녀왔어

제주에서 걷다 : 포토 에세이


가고 싶다


설 연휴가 하루 지난 오후쯤 갑자기 눈 덮인 한라산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제주도행 티켓을 구매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출발했지만, 딱히 한라산을 빼고는 어디를 가야겠다고 정하진 않았기에 나머지 일정은 등산 이후에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제주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섬이 점점 눈에 가까워 질 때쯤 한라산이 보였는데…. 나는 당연히 눈에 덮여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비행기에서 바라본 산은 눈은커녕 갈색의 산봉우리만 보였다. 2월의 제주도는 생각했던 것 보다 따뜻했나 보다. 공항 밖을 나서자마자 내 시선은 다시 한번 산을 향했다. 내일 눈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렌트한 차를 끌고 한라산 정상으로 향하는 코스인 성판악과 가까운 숙소로 이동을 했다. 예약을 했기에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내 맞은편 침대에 여행객이 짐 정리를 하고 있기에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여행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분께서는 오늘 한라산 정상을 다녀왔고, 성판악 코스로 시작해 관음사 방향으로 내려왔다며, 눈은 다 녹아 없었다면서 많이 아쉬워하는 모양새였다. 나도 개인적으로 눈 덮인 한라산을 보고 싶어 와서 그런지 그 말투에 묻어난 서운함에 공감했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하고 그분은 이내 침대에 누워 단잠에 빠져들었고 나는 휴게실에서 맥주 한 캔을  요량으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과자 한 봉지와 맥주 한 캔을 어 계산하고 숙소에 돌아와서 시원한 한 모금을 했다. 휴게실 안에는 두 분이 치킨에 맥주 한잔하고 있었으며, 나는 텔레비전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비우며 잠깐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무릎이 언제부턴가 제 능력을 다한 듯 조금만 무리를 하면 걷기 힘들 정도로 아파오는데, 이번에 등반하면 어김없이 통증이 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내일 백록담을 본다고 하면 4번째 정상 등반인데 3번째 정산 등반 했을 때부터 무릎 때문에 여간 고생을 해서 그런지 다가올 고통에 지레 겁이 드는 게 사실이다."


주변이 시끌시끌하다 어느덧 휴게실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단체 등산객과 친구와 함께 온 사람들로 공간이 채워졌다. 나도 그 안에서 조용히 한잔을 기울이고 있었을 때 아까 잠시 얘기 나누었던 여행자분이 내려와 함께 맥주를 하며,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시린 바람


부스럭 소리에 눈이 떠졌다. 밖은 아직 어둡지만 이른 시간부터 백록담을 보려는 사람들로 부산 스럽다. 잠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다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나도 슬슬 준비할 요량으로 몸을 일으켜 움직인다. 날씨를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는데 가로등 불빛 사이로 하얀 눈발들이 날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순간 말문이 막히고 웃음만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아 너무나 행복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챙겨 휴게실로 내려왔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준비해준 아침을 허겁지겁 먹고, 출발 전 주인아저씨에게 들러 김밥과 물 그리고 핫팩 받고 이동하려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눈이 많이 내려 체인 없는 차는 통제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미처 체인을 준비하지 못했기에 졸지에 버스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짐만 챙겨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이미 정류장에는 많은 사람이 대기 하고 있었고 성판악 가는 길목에는 경찰들이 나와 차량의 체인을 검사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버스를 탔고 성판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에 서서 만발의 준비를 끝내고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에선 눈발이 날리고 숲길 사이로는 눈꽃들이 하나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겨울 한라산은 나에게 항상 설렘을 안겨주었다. 엘사의 마음이 된 듯이 겨울 정원에 들어온 느낌이랄까?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 정신도 맑아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산에 오르는 것은 힘든 시간을 겹겹이 견뎌내는 일처럼 점점 발걸음을 무겁게 하지만 마음은 그와 반대로 점점 가벼워진다. 그래서 나는 산에 오른다. 바다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산을 더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거운 생각을 짐을 벗어 버리고 싶어 먼 길을 거침없이 걸어가는 순례자들처럼 말이다.


내가 도착한 날까지 제주는 따뜻한 날씨여서 여행하기 좋았다고 하는데, 오늘은 정말이지 코끝이 찡할 정도로 찬 기운이 몸속을 파고든다. 숲 사이로 걸을 때는 나무들이 바람막이가 되어 주어 바람을 많이 느낄 수가 없었지만 진달래꽃밭부터 백록담까지 올라 갈 때에는 바람에 몸이 휘청 거릴 정도로 매섭게 불었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얼굴에는 하얗게 서리가 맺혀 있는데 마치 영화 "히말라야" 포스터의 황정민이 내려오는 줄 알고 속으로 피식하며 정상으로 향했다.





백록담


나에게 백록담은 애증의 단어이다. 3번 올라서 제대로 백록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번에도 백록담을 본다는 기대치가 그리 높지 않았다. 제대로 본건 다 합쳐 5분도 안 되기에 더욱 그랬던 거 같다. 정상은 제대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장갑을 벗었는데 손가락이 순식간에 감각이 없어지는 현상을 느꼈다. 그래도 눈 덮인 한라산을 보게 해준 의미에서 꼭 사진을 찍고 가리라는 마음으로 딱딱하게 굳어가는 손가락을 입으로 녹이면서 셔터를 눌렀다. 역시나 백록담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래던 찰나에 구름이 점점 바람이 밀려나 온전한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이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그 모습을 보여준 모습에 나는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주변에서도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들이 이 추위를 뚫고 이 높은 산에 올라온 목적은 나와 같았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곧 내 목소리 같이 느꼈다.


그렇게 추위를 뒤로하고 산 정상에 서서 저 멀리 바다 쪽으로 향해 몸을 돌리고 아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구름이 마을과 바다를 지웠지만 틈틈이 보이는 능선과 부서지는 햇살이 마음을 달래 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상에서의 시간이 개인적으로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간 복잡한 일들로 머릿속은 어지럽게 엉켜 있었는데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수많은 혼란을 함께 가져 간 듯 머릿속을 시원하게 비워주었다.


내가 왜 눈 덮인 한라산과 백록담을 보고 싶어 했는지,

머리 속이 복잡하고 혼란할 때 마다 오고 싶어 했는지,

몸과 마음 그리고 머릿속으로 생생히 각인시켜주었다.




역시나 내 무릎은 이내 신호를 보냈다. 다리를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무릎에 통증이 밀려왔다. 스틱을 몸을 맡긴 채 그렇게 나는 천천히 하산했다. 무릎의 통증은 나를 아마 몇 일간 고생시켜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훈장처럼 각인시킨 이 통증을 밑거름 삼아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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