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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winkup Jul 15. 2016

초록의 힘을 믿어요

베란다 맞춤 다육이, 옵튜사

조금은 지쳐가는 여름을 보내고 있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아침의 다육이 구경조차도 '얼마나 예뻐졌나 볼까!'가 아니라 '밤새 별 탈 없이 무사하게 잘 있나 확인'하는 수준이라 맥이 빠지는 게 사실이다.


이럴 땐 역시, 초록이다.

옵튜사 Haworthia cymbiformis var. obtusa
튼튼한 뿌리를 가지고 있는 하월시아Haworthia 속의 일종으로 몸값도 모양도 천차만별인 하월시아 중에서도 저렴한 몸값(보통 천 원!)과 엄청난 번식력이 돋보이는 종류이다. 같은 이름의 값비싼 이종異種이 있다.


청포도알 같은 모양이라 종종 터뜨리고 싶다그러면 안됩니다거나 먹어보고 싶다그러지 마세요는 이야기를 듣는 옵튜사는 꽃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육이이자, 초보에게 권하는 베란다 추천 다육이기도 하다.

튼튼한 뿌리를 가졌고
조금 부족한 햇빛에서도 잘 자라고
물도 꽤나 좋아하는데다
틈만 나면 식구를 늘려주고
사계절 변함없이 예쁜 초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조금 부족한 햇빛'? 우리 집도 햇빛이 부족한데? 그런데 우리 집에선 다육이들이 다 죽어나가는데?
'물을 좋아한다'? 매일 물을 줘도 된다는 말인가? 매일 물 주면 안 된다고 했지 않았나? 네 그건 안되요



잠깐, 이쯤에서 이 집 베란다부터 살펴보자!


- 동향東向 베란다 : 아침 7시~11시까지만 햇빛이 들어오고, 다른 시간에는 어둡다

- 20층이고 정면에 높은 건물이 없어 탁 트인 시야

- 창을 열어두면 바람이 잘 통하는 환경, 기본 온도가 시원하다


맑은 날 아침에는 아래처럼 아침 햇빛이 쏟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침 8시의 베란다 모습
오후 3시, 밖은 해가 쨍쨍이지만 베란다는 마냥 어두울 뿐이다.

하지만 이미 정오를 지나면서 베란다는 확연히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하루 중 베란다에 들어오는 햇빛의 양을 주관적으로 판단하여 순서를 매긴 후 사진에 표시해 보았다.  


햇빛의 양 : 직광(베란다 걸이대나 옥상에서의 노숙) >>넘을 수 없는 벽>> 1번 > 2번 >> 3번 > 4번(반그늘)

1번 : 아침 시간에 약 4시간의 햇빛을 받을 수 있다. 이를 100%로 생각한다.
2번 : 위쪽이지만 측면으로 약 70%의 햇빛을 받는다
3번 : 아래쪽이거나 유리창을 통한 약 50%의 햇빛을 받는다
4번 : 아래쪽이고 측면이라 약 30%의 햇빛을 받는다


이를 토대로 지난 3년 간의 경험을 더해 '우리 집 베란다와 궁합이 맞는 다육이'를 알아보는 방식은 이렇다.

1. 적당한 구역에 다육이를 둔다.
2. 1주일 정도의 유예기간 중 키가 자라거나, 모여있던 잎이 벌어지는 변화 - 즉 웃자람의 징조가 보인다면 햇빛이 모자란 것으로 판단하여 자리를 옮겨준다.
3. 아무리 1번에 두고 물을 아껴가며 - 두 달 이상 물을 주지 않는다 - 관리했음에도 웃자란다면 해당 종을 더 이상 새로 들이지 않는다.

결국 정야, 환엽송록, 오로라, 을녀심, 레티지아 등의 국민 다육이들은 생각보다 많은 햇빛을 원했고, 베란다 명당으로 일컫는 1번 자리에서도 계속 웃자랐으므로 한번 실패하면 더 이상 비슷한 종류는 들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 누가 남을까? 이 베란다는 염좌, 월동자, 십이지권, 천대전금, 우주목 등의 무난한 다육이로 채워지게 된다. (당신을 첫눈에 사로잡은 다육이들 편 참조) 그중에서도 특히 옵튜사를 예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하는 이유는 유독 싱그러운 초록색을 사계절 내내 간직하는데다, 식구 늘리기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명실상부 블링블링한 센터의 미모


옵튜사는 보통 베란다 3번이나 4번에 두는데, 여기가 바로 '조금 부족한 햇빛' 이 드는 반그늘 자리이다. 1번이나 2번 자리에 두면 어떻게 될까? 빛이 과하면 옵튜사는 금방 갈색으로 변한다. 단순한 태닝이라 딱히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자칫 탈수의 위험도 있고, 미모도 초록색일 때가 더 좋으니 반그늘에 두는 게 좋겠다. 갈변되었던 옵튜사는 자리를 옮겨주면 며칠 지나지 않아 맑은 초록색으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속의 옵튜사는 햇빛에 탄 채로 모체에서 떨어져 나왔기에 다른 다육이(쿠페리)와 함께 심어주었는데, 물을 주었더니 약 이틀 만에 제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또한 일주일 만에는 부쩍 살이 붙어 통통해지고 크기도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변화를 통해 화분 속 뿌리가 건강하게 잘 자리 잡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이맘때부터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라면 드디어 나도, 우리 집에서 다육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참, 2년 후에는 이렇게 멋지게 자라났다.


옵튜사는 언제 물을 줘야 할지 알기 쉬운 편인데, 통통한 얼굴이 바람 빠지듯 홀쭉해지고 잎이 아래로 쳐지기 전에 주면 된다. 그러면 바람 좋은 봄가을에는 2주에 한 번, 여름(장마 제외!)이나 겨울(혹한기 제외!)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물을 원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뿌리를 잘 내린 옵튜사는 혼자만 자라지 않고 식구들을 거느리기 좋아한다. 혼자도 좋지만 여럿은 얼마나 즐거운가!


다글다글 나오던 식구들이 엄마의 얼굴을 가리기 시작하고 화분이 터져나갈 때쯤 대대적인 작업이 이뤄졌다. 사실 이 정도 대식구가 되면서 점차 양분이 모자랐는지 엄마도 지치고, 꼬마들도 웃자라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작은 얼굴마다 달린 뿌리를 확인하고 잘 모아서 그들만의 새 아지트를 만들어 주었다. 하나에 천 원씩 들인 두 개의 옵튜사는 2년 동안 열심히 식구들을 늘렸고, 식구들이 분가하여 나온 작은 화분이 늘어나 베란다 정원을 채운다.


식구들을 모두 떠나보낸 모체는 아직도 다소 힘이 빠진 모습이다. 하지만 난리통에도 지치지 않고 다시 자구를 내는 너란 옵튜사, 강한 옵튜사.



옵튜사가 속해 있는 하월시아haworthia들은 똑같은 얼굴의 꽃을 피운다. 꽃대는 튼튼하고 길게 뻗지만, 하얗고 작은 꽃은 다소 소박하다. 꽃대를 뜯어주지 않았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모체로 가야 할 양분이 꽃대로 옮겨 가게 되니, 모체의 건강을 위해 한 뼘 이상 길어진 꽃대를 살살 잡아당겨 뜯어주면 깨끗하게 떨어진다. 뜯어낸 꽃대는 물에 담그면 꽃이 피니 너무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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