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워서갈비 Jul 05. 2021

적어도 최악의 육아는 아니어야지

그냥 같이 걷자 우리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에네르기파를 모아 상대에게 결연한 한방을 날리는 손오공처럼. 부글대며 끓어오르는 이 불길한 에너지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 아니야, 침착하자. 상대는 어린이라고. 자아가 분리된 것처럼 나한테서 나온 또 다른 내가 나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드디어 미쳐가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결국 분노 게이지의 칸이 모두 다 채워지고 말았다. 목구멍을 지나 육성으로 터져나가는 나의 고함소리. 울음이 터진 아이 앞으로 종전의 것보다 더 큰 고함소리가 내내 이어졌다. - 화장실에서 아이 양치시키다 벌어진 일.     


"밥 먹자."
"안 먹어!"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어야지."
"안 먹어!"
"엄마가 열심히 만들었는데."
" 안 먹어어!"
"한 숟갈만 딱 먹어볼까? 그럼 생각이 바뀔 텐데."
"안 먹는다구!"
"반찬이 싫으면 김에라도 싸줄까?"
"안 먹는다니까아!"
"자, 한 숟갈만..."


갓 지어 꼬들꼬들한 흰쌀밥을 한 숟갈 퍼서 아이 입 앞으로 가져간다. 둔탁한 충격과 동시에 밥알이 하늘로 비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은 이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아이가 손으로 숟가락을 탁 쳐버린 것이다. "아악! 안 먹어!" 너도, 나도 눈물을 삼키고 있다. 몇 번 더 시도했지만 잔인한 실패만 남았다. 저항할 힘도 없었다. 깔끔히 포기했다. 아니, 사실은 깔끔하지 않았다. 아주 구질구질하게 아이가 잠들 때까지 삐져 있었다. - 저녁밥 전쟁.               





25개월 동안 무난한 육아를 해왔다. 지나치게 에너지가 넘쳐 잠을 잘 안 자고 가끔 짜증을 내는 것만 제외하면. 그래도 어린이집 적응도 잘했고 그간 병원 갈 일도 많지 않아 덜 힘든 육아를 한다고 생각했다. 주위에 조력자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 육아 면역력 거의 길러지지 않은 까닭이. 취약한 상태에서 맞닥뜨린 지난 6개월간의 육아는 유난히 독했다는 어느 겨울의 감기처럼 내 정신과 신체를 흔들어놓았다.     


아이는 사사건건 싫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이의 하원 시간. "오늘 재미있게 지냈어?" "응! 오늘 수박주스를 만들었는데요..." 부드럽고 우아하게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으르렁대는 맹수의 포효처럼 바뀌었다. "미세먼지가 많아서 집에 들어가야 할 거 같아. 대신 엄마가 물감놀이해줄게." "싫어! 안돼! 으아아아앙!" 무조건 싫다는 아이. 운전하는 중 뒤에서 짜증을 내는 아이 탓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내가 조용히 하라며 큰 소리를 내자 아이는 더 크게 울어재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다 싫다고 하는 것 같아 속상해진 나는 그날 내내 감정적으로 아이를 대했다.


그러다 아이가 잠들면 깊은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아이 정서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을 텐데... 내가 또 그러면 진짜 난 엄마 자격이 없는 거야!" 이런 다소 극단적인 결론을 내린 후 울먹거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등원 준비를 하면서도 내내 '싫다'는 말만 반복하는 아이에게 똑같은 패턴으로 분노를 시전 했다.     


아이는 모든 것을 반대로만 하기 시작했다. "우유 안 쏟게 잘 먹자." 하며 우유를 주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컵을 뒤집어엎고 "헤헤" 웃은 다음 바닥에 쏟아진 우유를 손으로 휘휘 젓기 시작했다. 침대 위에서 "잘 자." 인사하면 다시 거실로 나가 불을 환하게 켜고 자동차 놀이를 시작했다. "티비 이 편만 보고 끄자." 하면 "안 끄면? 안 끄면 어떻게 돼?" 묻고 "안 끌래!" 했다. 특히 밥을 대놓고 안 먹는다고 선언한 후 애써 만든 반찬을 손으로 갖고 놀거나 집어던질 때면 속에서 자꾸만 에네르기파가 생성되곤 했다.


내가 화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었구나. 나는 이토록 감정적으로 불안한 사람이었구나. 아이를 대할 때마다 불완전한 나를 자꾸 직면하게 되었다. 힘들었다. 몸도 힘들지만 마음이 더 힘들었다. 온갖 책의 좋은 구절에 밑줄을 치고 사람들과 우아하게 대화하면서 아이한테는 버럭버럭 소리나 질러대는 엄마라니. 너무 가식적인 것 아닌가. 남편 보기에도 부끄러웠다.               





그렇게 전쟁통에서 허덕이며 겨우 살아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아이와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씩씩대며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이가 옆으로 쓱 다가왔지만 감정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라 모른척했다. 그때 아이가 이렇게 말다.     


"엄마, 소리 지르지 마세요."
"..." (할 말을 잃음)
"엄마 목이 아프잖아요."
"..."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음)


며칠 동안 습관적으로 고함이 생각보다 앞서 나갔다. 소리지르기가 습관이 되자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을 일에도 소리부터 질러댔다. 그저 그 상황을 빨리 종료해버리려는 단순한 사고였다. 소리 지른 후 자주 "아휴, 목아퍼..."라고 말했던 것 같다. 아이는 이미 엄마의 소리 지르는 습관을 알고 있었다. 고함소리에 상처도 받았다. 하지만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은 엄마의 마지막 말이었나 보다. "아휴, 목아퍼..." 하는. 그래서 오늘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왔다. 다른 것보다, 엄마 목이 아프니 소리 지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     


말로도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선을 넘으면 일종의 정서적 학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래서 아이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했던 나를 어쩐지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고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기에. 물론 내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몇 번의 잘못한 일에 얽매여 앞으로의 육아의 시간마저 그르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아이의 말을 듣고 나용기를 내기로 했다. 우선 아이에게 뛰어가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거듭 사과했다. 그렇게 했던 이유와 앞으로의 노력에 대한 이야기도 간단히 덧붙였다. 하지만 반전은, 아이의 말을 듣고 내가 당장 바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는 내가 정말 구제불능이 아닌가 잠시 생각했다. (물론 데시벨과 횟수는 줄었지만...)               





그 후 이것이 의지로만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구조적으로 내가 바뀔 수 있는 여건을 세팅해보기로 했다. 일단 '육아하는 나'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엄마 기질 분석을 실시했다. (기질 분석 결과는 다음 편에...) 결론적으로 기질 분석 결과는 행동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내면 아이'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


또 아이의 발달 단계를 이해하기 위해 어린이집 선생님, 아동학이나 유아교육학 관련 전문가 등과 상담을 했다. 자기주장이 생기면서 떼를 쓰거나 반항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했다.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그런 행동을 지지해주어야겠다는 마음도 생겨났다. 그리고 떼쓰는 아이에게 몇 가지 선택지를 준다던가 하는 구체적인 팁들도 얻었다. 또 너무 감정적으로 아이를 대할 것 같으면 그 순간을 장난치듯 사진으로 담아 분위기를 한결 누그러뜨리는 것도 방법이었다.          


정말 사랑하는 너. 사랑은 하는데...


마지막으로 내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이토록 사랑하는 아이에게 대체 왜 화가 날까. 우선, 육아를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애썼는데...'라며 홀로 기대한 다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아이에게 크게 실망해버렸다. 그리고 훈육에 대한 압박감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의 습관을 바로 잡는 역할이 부담스러웠다. 위계상 내가 아이의 위에 있다는 은근한 권위 의식도 존재했을 테고. 아이가 나에게 반항한다고 느끼자 아득바득 이기려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되어 이에게 감정의 화살이 돌아간 것이었다.


물론 육아가 쉬운 일은 아니다. 아마다 결이 다르기에, 우리만의 답은 수없이 겪어냄으로써 직접 찾아야 한다. 동시에 멈출 수도 없고 또 멈추어서도 안 되는,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과정이다. 육아는 꼭 끝없이 걷는 것과 닮았다. 렇다면 육아를 우리만의 '걷기'라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떤가. 누군가와 걸을 때 지나치게 앞서 나가거나 또 뒤에서 걸어가지 않듯이, 육아 역시 지나치게 잘하거나 지나치게 무심하지 않은 상태로 담담하게 해 나가는 것. 내가 언제나 아이를 성장시키는 완벽한 육아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같이 걸어가는 사람으로서 아이를 존중하고 내 보폭에만 맞추어 아이를 끌고 가지 않는 것만큼은 가능할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걷는 것을 닮은 육아는 적어도 '최악의 육아'는 아닐 것이다.


그래, 그냥 같이 걷자. 어차피 걸을 거라면 적당한 호흡으로 서로 마주 보며 유쾌하게 농담도 하면서 걷자. 네가 멈추면 나도 잠시 멈추어 이 시련(?)이 지나가길 하니 기다리기도 하련다. 문득 너와 걷고 있다는 그 사실이 미치도록 좋아 너를 으스러지게 껴안는 날도 있겠지. 그렇게 우리 계속 좋은 곳으로 맨날맨날 걸어가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