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이 없는 육아의 세계에서 정답을 찾아 헤매다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나는 도대체 누군데 이렇게 여기서 육아를 하고 있지? 육아가 나한테 잘 맞는 옷인가? 내가 육아를 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 나는 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육아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직업을 고를 때에도 적성을 따지는데, 육아에는 그런 유의 대책 없이 임했나. 그렇다면 나를 심도 깊게 한번 탐색해보자 싶었다. 나는 그 첫 번째 시도로 기질분석을 선택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격적 특성인 기질(temperament). 요 기질을 분석하면 육아에 조금 더 잘 대처할 수 있다는데, 특히 기질분석을 소개하는 이 문장들이 마음을 흔들었다.
부모로서 해야 하는 역할이 누구에게나 다 잘 맞는 것은 아니다. 육아를 하는 환경이 누구에게는 유독 답답할 수도 있고, 아이와 밀착되어 보내는 시간이 힘들 수도 있다. - 그로잉맘 <기질분석 샘플> 중.
기질분석은 다양한 방법으로 해볼 수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많이 알아보지 않고 평소에 알던 온라인 앱에서 비대면 검사를 했다. 기질을 임의로 색깔을 지정한 '블록'으로 설명하는 곳이라 좀 더 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빨강, 파랑, 노랑, 분홍, 초록 블록으로 불리는 기질들은 여러 조합으로 우리 성격을 구성한다고 했다. 뭐 어떤 블록이 좋은 블록이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참고로 완전히 내돈내산으로 진행되었다.)
검사지를 보내고 하루, 이틀이 지났을까? 두근두근 기다리던 기질분석 보고서가 앱으로 띵동, 도착했다. 내 기질분석 결과를 보니 나는 어느 하나의 기질이 많기보다는 모든 기질 수준이 높은 편이었다(노란색만 빼고). 특히 새로운 것을 보면 달려드는 기질과 위험하다고 느끼면 피하는 기질이 동시에 많았다. 아니 이게 가능해? 이런 모순 덩어리.거기다 파고들며 몰두하는 기질도 많은 편이었다.
나의 기질블록 공개 짠!
이렇게 복잡다면한 기질분석 결과를 마주하고 보니 나 스스로도 해석이 잘 되지 않았다. 물론 분석 보고서에서는 친절하게 나의 기질에 대해 설명해주고 육아 방향도 함께 제시해준다. 그래도 나는 배가 고파서, 조금 더 깊게 기질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도 안 물어보고 아무도 안 궁금해했으나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셀프 인터뷰 <당신의 기질>을 기획했다.
본격 나혼묻나혼답 인터뷰,
<당신의 기질>
당신의 기질을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지만 동시에 걱정도 많아요. 상반되는 특성이 한데 있으니 혼란스럽기도 해요. 예를 들어 한번 꽂히면 에너지를 쏟아붓지만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다가 지쳐서 시작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리고 불안은 나의 힘! 주로 불안을 땔감으로 사용해요. 일단 시작한 것은 완벽하게 하려는 편이에요.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건조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이라고 하네요!
어린 시절에도 과연 이런 기질의 아이였나요?
생각해보니 이것저것 해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초등학생 때는 피아노, 가야금, 사군자, 일기 쓰기 같은 것을 꾸준히 했어요. 아빠가 헌책방을 하셨어서 책도 다양한 분야를 접했어요. 또 엄마가 제가 조금이라도 관심 있으면 무조건 일단 해보도록 판을 만들어 주셨어요. 그런 습관이 이어져서 포토샵, 웹소설, 음악방송도 시도했었어요. 시작했다가 막상 엎은 경험도 꽤 있었는데 예를 들어 발레 클래스를 신청하고 비싼 용품들 싹 구입한 다음 몇 번 하다 그만둔 기억이 나요.
이런 기질이라서 좋았던 점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이런 기질이 어른이 된 후 '일'에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탐험력과 완벽주의라는 특성을 살려 대학원에서 학문을 파고드는 일을 선택했고 성과가 좋게 나왔어요. 불안이 많기에 꼼꼼하게 계획하고 플랜 B, C까지 모두 준비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내적 기준도 높고요. 다만 끌고 가는 에너지가 제게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다른 일들은 모두 쳐내면서 지금까지 해온 편이에요.
이런 기질이라 뭔가 힘들었던 점은요?
일의 결과는 좋게 나왔지만 그 과정 속에서 제가 많이 마모된 느낌이에요. 지독한 번아웃이 와서 힘들었고 지금도 힘들죠. 또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노랑 블록이 상대적으로 좀 낮은 편이에요. 애초에 기질적으로 관계에 민감하지 않은 데다 일에만 에너지를 과도하게 쏟다 보니 여러 관계들을 정말 많이 놓치며 살아왔어요.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거죠. 육아도 일종의 인간관계니까 지금 육아할 때도 아이의 감정을 잘 살피는 것이 가장 서툴러요.
앞으로 어떤 결의 어른이 되고 싶나요?
여유 있고 단단한 어른이요. 조금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은 해요. 너무 힘들게 살 필요는 없다고 봐요. 다양한 것을 탐색하는 기질을 활용해서 재미있게 살고 이 과정에서 약간의 루틴을 버무려도 괜찮을 것 같아요. 또 완벽주의 기질이 높은 것은 여유로움과 잘 밸런스만 맞춘다면 은근히 강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네 명의 완벽주의자>라는 책에서 '행복한 완벽주의자' 유형이 있다는 걸 봤거든요. 마지막으로, 사람을 향한 시선을 좀 더 확장하고 싶어요.
솔직히 처음 기질분석 결과를 보고 나는 이런 반응이었다. "뭐? 내가 무절제하다고? 뭐? 근면하지 않다고? 으익, 다른 사람의 감정에 예민하지 않다니!"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곱씹을수록 분석 결과에 묘하게 신뢰가 가는 것이다. 처음엔 뭔 맛인지도 모르지만 씹을수록 달큰한 햇무 같달까. 그건흐리멍덩하던 나의 육아 화질이 높아지는 것을 느끼면서부터였다. 기왕 분석을 했으니 적극적으로 육아에 활용해보기로 했다.넘치는 탐험력 해소를 위해 아이와 함께 하는 다양한 활동을 구상했다. 단, 쉽게 지칠 수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하루 10분씩만.'너무 욕심내지 말자. 오늘 못하면 내일, 심지어 안 해도 그만이야.' 이런 작은 마음으로.또 관계 블록이 적으니 의식적으로아이와의 관계를1순위로 두려고 노력했다.내 기질이 관계가 아닌 성취나 완벽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자체만으로큰 도움이 되었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을 수 있어.' 레이더가 촉! 하고 켜지면서 드디어 아이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육아 때문에 시작된 '나 탐구'이지만 의외로 인생 전반을 짚어보는 기회도 되었다. '나는 빨강 블록이 많으니까!'라며 이것저것 다양한 일들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안이 엄습해 오면 두려워하기보다 '내 기질이 원래 그런 걸.' 하며 그 순간을 잘 넘기게 되었다. 맞다. 내 기질을 잘 알고 다스리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흐흐, 무슨 도인 같은 말이지만 정말 그렇다. 기질을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아는 게 낫고, 특히 내가 가진 좋은 기질에 집중하는 것은 어쨌든 인생에 보탬이 된다.모순 덩어리의 슬기로운 기질 생활은 앞으로 육아에서도, 일에서도 계속될 것이다.여유롭고 단단한 어른을 꿈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