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잠들고 나면 매일 형벌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늘 나에게 하게 되는 질문 한 가지.
오늘은 좋은 엄마였나?
'좋은 엄마' 였냐니. 적어 놓고 보니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싶다. 좋은 엄마를 재는 100점짜리 척도가 있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저울에 달아 키로수로 평가하나? 좋은 엄마였는지 정확히 판단하는 어떠한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방법이 없다는 것은 어떠한 방법도 가능하다는 말과 같다. 내 경우에는 내 머릿속에 있는 좋은 엄마의상과 실제 엄마가 매일 결투를 벌인다. 좋은 엄마 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실제 엄마는 실격한다.엄마라는 이유로 매일 밤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나를 눕히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가 나온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길면 그만큼 잘라내고,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서 죽였다. 그러나 침대에는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있어, 그 어떤 나그네도 침대의 길이에 딱 맞을 수 없었고 결국 모두 죽게 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엄마라는 침대를 만들어두고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스스로를 엄벌에 처하다니 너무 가혹하다. 게다가 완벽히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머릿속에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좋은 엄마 상을 현실 세계에서 따라잡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좋은 엄마란 뭔가 하루 종일 미소 짓고 영양가 있는 찬을 내어오며 놀이에도 열심인 엄마일 거라는 거대한 상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아이와 있으면서 많이 웃고 같이 놀기도 하고 겨우겨우 밥도먹였어도, 한번 인상을 쓰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빵점이 된 것 같다.
내가 가진 좋은 엄마 상은 대부분 육아서나 맘카페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한 번은 모박사의 육아서에서 아홉 번 잘해주고 한번 화내는 것보다 열 번 못해도 일관성 있게 대해야 한다는 글을 보았다. 사실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였다. 다른 조언들도 유익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일종의 족쇄가 되었다. 조언 하나하나에 비추어 나를 심하게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하루 이만하면 잘 보냈다고 생각하다가 마지막에 잠투정이 심한 아이 때문에 살짝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한번 잘 못한 그 순간 때문에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실패했다는 그 생각으로 인해 괜한 짜증이 또 났다. 그 후에는 짜증이 짜증을 낳는 무한 증식의 과정이 이어졌다. 악순환의 굴레가 육아를 갉아먹고 있었다.
맘카페에는 또 어찌 그리 좋은 엄마들이 많은지. 매일매일 아이를 위한 육 첩 반상 레시피를 올리는 엄마를 보며 떡갈비만 구워주는 나는 아이에게 미안해진다. 육아에 대한 어떤 질문을 적으면 아주 구체적인 팁을 공유해주며 '저는 이렇게 해요.' 하는 친절한 댓글이 달린다. 현실에서 이 댓글은 갑자기 나를 검열하는 목소리로 바뀌면서 '누구 엄마는 이렇게까지한대. 넌 안 해?'라고 나를 채근한다. 잘하고 있는 사례들만 자꾸 주워 모으다 보니 그것이 꼭 평균처럼 여겨지고 평균 이상은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생겨난다. 모든 좋은 예를 갖춘 엄마는 현실 세계에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맘카페에서 공유되는 육아팁을 나를 향한 회초리쯤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것을 깨달은 후부터는 맘카페에 잘 접속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좋은 엄마 상은 내가 육아서와 맘카페를 접하기 이전부터 내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본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하는 가정적인 엄마의 그림. 자라오며 가정에서 학교에서 나의 엄마에게 요구되었던 사회적 기대들. 어른이 되어 주위에서 만났던 열과 성을 다하는 온/오프라인의 엄마들. 그렇게 좋은 엄마 상은 꾸준히 쌓아 올려져 마침내 내가 엄마가 되자 밖으로 튀어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가 이야기하는 좋은 엄마, 좋은 육아는 어느새 내 머릿속 조종석을 장악했다. '이 정도는 해야지. 다른 엄마들은 이렇게 해준다던데. 우리 아이만 뒤쳐질 수 없지.' 죄책감도 부여했다.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니. 좀 더 노력해.'
하지만 좋은 엄마가 아니라면 매일 밤 형벌의 타임을 가질 리가 없다. 좋은 엄마였냐는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내가 괜찮은 엄마라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다.어차피 완벽히 좋은 엄마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좇을 필요가 없다.그러니 사회가 부여하는 좋은 엄마 상을 내면에 받아들이기보다 나만의 단단함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쳐낼 건 쳐내는 배짱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매일 밤, 아이가 잠들면 형벌이 아닌 그날 아이와 내가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고 싶다. 좋은 엄마 말고 그냥 엄마 해도 괜찮다. 좋은 엄마 상이라는 거짓말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자. 그건 그냥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처럼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