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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워서갈비 Aug 04. 2021

너, 찌질하구나

찌질함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애정의 역사다


가끔 내 안의 찌질함과 마주하게 된다.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깃들어 있는 찌질함이 있다. 나 빼고 누가 잘 되면 배 아파하는 찌질함. 싸우면 나만큼 너도 신경 쓰이면 좋겠는 찌질함.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된 찌질함.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을 안 그런 척하는 찌질함. 항상 찌질한 상태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 찌질한 순간을 맞을 때가 있다.


남편과 다툴 때 나는 찌질해졌다. 상대의 말에 세련된 반응을 하지 못했다. 감정이 북받치면 울며 불며 콧물 바람이 되었다. 아주 유치해지기도 했다. 연애할 때도 먼저 연락하지 말라고 해놓고 다음날이면 엉엉 울면서 전화를 했다. 절대 헤어지면 안 된다고 통곡을 했다.


궁상과 찌질함의 콜라보레이션도 존재했다. 대학원 시절, 저렴한 원룸만 찾아다녔다. 한겨울에 보일러가 고장 났는데 주인에게 수리비를 떼어 먹혔다. 방을 빼고 나서도 '그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꼭 말해줘야지' 씩씩대며 근처를 기웃거렸다.


내로남불형 찌질함도 있었다. 초예민하던 임산부 시절, 위층의 18개월 아기 발소리가 왜 그리 크게 들리던지. 그러나 위층에 당당히 인터폰을 하던 나는 지금 쿵쾅대는 우리 집 아기 때문에 아래층에 굽신거린다.


그 외에도 직장 생활의 힘듦을 토로하면서 내뱉은 누군가에 대한 험담, 내 이익 챙기느라 다른 사람은 고려못하는 편협한 생각, 내 감정만 최고인 줄 아는 배려 없는 확신도 나의 찌질한 순간들을 만들었다.





아무리 찌질함이 솔직함이나 인간다움으로 여겨지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찌질함은 말 그대로 찌질함이다. 누군가에게 드러내기 어려운 조악한 행동이자 감정이다. 나 스스로도 나의 찌질함을 인정하기 어렵다. 쿨한 척 포장하기에 급급한 것이 인간의 단면이다.


남편은 10년 동안 그런 나의 찌질함을 지켜본 사람이다. 그는 내가 보기에 상대적으로 나보다 덜(?) 찌질한데, 나처럼 크게 기대하고 크게 실망하지 않기에 그렇다. 기본적으로 모든 일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니 내 행동들이 남편 입장에서는 더 찌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때로는 토닥이고 때로는 동조하면서 찌질함의 순간들을 나와 함께 지나왔다. 판단하지 않고 '쟤는 저렇구나'하고 생각하는 것. 사실 찌질한 순간에는 딱 그것만이 필요하다. 어떤 개입도 그 사람을 더 찌질하게 만들어버릴 뿐이다.


남편은 내가 좋을 때도 행복할 때도 찌질할 때도 그냥 옆에 있었다. 크게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히 찌질함을 지켜봤을 뿐이다. 어쩌면 찌질함까지 지켜봐 주는 것 남편 식의 애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찌질했던 순간의 나를 담담히 바라본 그 시간들 자체가 바로 애정의 역사가 되었다.




10년이 흐른 지금, 나는 자신의 찌질함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질투하는 내 모습, 궁상떠는 내 모습, 싸이월드 속의 과거 내 모습도 다 괜찮다. 나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찌질한 나도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마다 나는 성장했다. 남편이 나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나를 인정하는 방법을 배웠다. 남편이 내어준 안전 기지 위에서 충분히 연습도 할 수 있었다.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애정의 역사가 나를 성장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찌질함을 지켜봐 주는 것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단지 연인이라고 해서 상처 받으면서까지 애정의 역사를 쌓아 올릴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껏 남편은 애정 속에서 자신의 베이스를 내어주었다. 나는 그것을 발판 삼아 찌질함을 직면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단계로 가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로 또 애정의 역사를 만들어가자. 애정의 역사는 서로의 찌질함까지도 함유해 단단해진 채로 나아갈 것이다. 역사는 늘 반복되면서도 발전하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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