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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누워서갈비
Aug 06. 2021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들었어
엄마로 살아가는 A에게
안녕, A야.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너의 하루를 떠올려볼 수 있어.
아주 일찍 하루가 시작돼. 아이를 씻기고, 입히고, 먹인 다음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지.
아이는 어느새 자기주장이 생겨 고분고분하게 따르지만은 않아.
그렇게 혼이 쏙 빠진 채 집으로 돌아오면 오늘도 정리할 것이 아주 많아.
정작 네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집안을 치우기 시작해. 네 성격에, 그럴 것이 틀림없지.
A야.
네가 드디어
퇴사
했다
고 말했던 날을 기억해.
너는
홀가분한 듯
까르르 웃었지만
난 왠지 기분이 이상하더라.
물론 아이에게도 좋은 일이고 너도 조금은 쉴 수 있어 다행이긴 했어. 맞벌이하는 게 좀 힘들어야지.
퇴근하고 나서도 여러 집안일을 해야 해서 힘들어했었잖아.
당연히 네가 잘 생각해서 결정했겠지만은
그래도 혹시나 네가 이 이유'만'으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불안했나 봐.
아이의 생후 3년은 정말 중요한 시간이라 엄마가 꼭 곁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
왜냐하면, 내가 그랬거든.
한창 일을 할 때엔 육아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꼭 안아주는 시간을 실컷 보내고 싶었어.
그래서 아이에게 조금 더 집중하는 삶을 택했지.
그런데 나는 그 선택에 '나'를 포함시키지 못했어.
내가 어떤 인간인지 생각하지 않았던 거지.
이성보다는 모성이 더욱 컸던 시기에 했던 선택이라 그랬었을까.
정신 차려보니 나에게는 그 시간이, 나에게도 그리고 아이에게도 조금은 해로운 시간이 된 것 같아.
아이를 품에 안고 눈으로는 다른 것들을 좇으며 매일을 살아서.
그 전엔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는데, 어디선가 이 말을 들은 적도 있었어.
"너는 집에서 놀잖아."
단
한 번도 놀지 않았던 내 삶은,
누군가에게
편안히 사는 삶으로 보이고 있었어.
무시무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탈출해 안온한 집에서 적당한 강도의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 나였어.
그냥 나는 엄마를 택했을 뿐인데 말이야.
저 말은 사람을 속절없이 무너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
었어.
처음에는 틀린 말도 아니라며 넘기려 했는데 며칠을 끙끙 앓게 되더라고.
나
학교 다닐 때 사회학 수업
되게
열심히 들
었거
든
. 수업 시간에 이런 내용도 있었어.
자본주의는 가족 임금을 통해서 노동의 재생산에 드는 비용을 교묘하게 절약해. 전업주부의 숨겨진 노동을 통해서 노동자가 먹고, 자고, 열심히 건강한 노동력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게 하는 거지.
가사노동이나 양육까지 전부 유급
으로 쳐주면 자본주의가 도저히 유지될 수가 없으니 무급으로
후려친 거야.
실제로 계산해보면 전업 주부의 연봉은 약 3,800만 원 정도래. 지금은 이것보다 더 많을지도 몰라.
아무튼
나 노는 거 아니라고,
머리로는 정말 잘 되받아칠 수 있었거든? 근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
나도 아직 정답은 모르겠어.
비하적인 표현으로 쓰여서 그렇지 집에서 '노는' 게 나쁜 건지 조차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 경제적 독립은 남자든 여자든 누구에게나 필
요한 거 같긴 해.
정아은 작가의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에도 전업주부를 '타인의 자비심에 기댄 사람'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고 적혀 있더라.
사실이 아닐지라도, A야.
너와 내가 그런 통념을 견뎌낼 수 있을까?
엄마의 시간이라는 거 생각보다 정말 고독하더라.
나만 못 참나 싶어서 여기저기 참 많이도 기웃거렸는데 다행히 지금은 중간 지점을 찾은 것 같아.
하고 싶은 일도 찾았어. 적당한 때에 다시 날아오르려고.
A야.
눈 반짝거리
던 대학생
때의 너도 너고,
퇴사하기 전 치열하게 일하던 순간의 너도 너라는 거.
그것만은 잊어버리지 말고 지금의 순간을 즐겼으면 좋겠어.
너를 갉아먹는 수많은 시선들에 상처 받거나 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곧,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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