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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워서갈비 Aug 12. 2021

인생의 리플레이

다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꿈결처럼 잠이 어룽대는 시간에, 혹은 길을 걷거나 샤워를 하다가 문득. 나에게는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는 인생의 몇몇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에서는 특정 장면이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처음으로 돌아가 자꾸 되풀이된다.





대학교 졸업식 날이 다가왔다. 석차를 계산해봤더니, 어쩐지 내가 특정 상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과에서는 어떠한 연락도 없었지만 왠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우습다. 졸업식 상 수여에 '서프라이즈'를 기대했다니... 청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일까? 어쨌든 그 당시에는 자신감 있게 가족들에게도 이 사실을 사방팔방 알렸다. 급기야 멀리 부산에 계신 외할머니까지 졸업식에 오시게 되었다.


졸업식이 시작되고 그 상의 주인공이 발표되는 순간, 사회자의 입에서 내가 아닌 다른 이름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단상 위에서는 나 아닌 다른 이가 단정하게 웃고 있었다. 일그러진 표정을 한 내 등 뒤로 외할머니와 엄마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계셨다. 나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학과 사무실로 달려갔다.


학과 조교였던 K 선배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조금 찾아보더니, 졸업자 명단에서 내가 누락되었고, 이미 졸업식이 끝나버려서 손 쓸 방법은 없다고 했다. 선배는 어쩌겠냐며 웃었다. 부아가 치밀었다. 이렇게 중대한 일을 실수해 놓곤 웃고 있다니! 선배가 원망스러웠다. 그 자리에서 어린아이처럼 한참 떼를 썼다. 너무 속상하다며. 이 일을 어쩔 거냐며.


K 선배는 말했다.

상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 거냐고.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 상 안 받아도 네가 열심히 한 거 다 남아 있다고.


그렇게 한쪽에서는 책망만 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허허허 웃으며 아무 해결책을 안 내놓다가 상황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나는 외할머니와 엄마와 탕수육을 먹으면서도 한참을 씩씩거렸다. 나 대신 상 받은 이의 그 단정한 미소가 자꾸 생각나서.





또 다른 장면이다. 대학원 시험 기간이었다. 마침 과메기가 제철인 때라 다 같이 먹으려고 학과 연구실로 몇 박스를 주문했다. 구룡포로 여행 갔을 때 직접 먹어보고 매년 주문하는, 맛이 보장된 집이었다. 그 집 과메기는 정말로 실했다. 바다 생물 먹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조차도 그 집 과메기라면 덮어놓고 달려갔다. 과메기를 초장에 담뿍 찍어 마늘쫑 몇 개를 올리고 김에 둘둘 싸서 입 안에 넣으면 황홀다.


그날 과메기 택배 박스가 연구실로 도착했다는 소문을 듣고 대학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많은 사람들 중 나의 시선을 잡아 끄는 사람은, J 선배였다. 자신 과메기를 한 번도 안 먹어 본 사람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오늘도 절대로 먹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권유에 과메기 한 점을 입에 넣은 그는 정말 순식간에 돌변했다.


한 점, 또 한 점. 람들이 놀랄 정도로 그는 빠르게 과메기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평소에 동작이 느려 '선비'로 통했던 J 선배였다. 그러나 과메기 앞에서는 달랐다. 아주 신속하게 지척에 있는 과메기란 과메기는 죄다 포섭해가고 있었다. 나는 문득 위기의식을 느끼고 말았다.


'이... 이러다가 과메기가 모두 없어지겠어.'


그런 생각을 하자 어쩐지 나 또한 그 속도에 맞추어 과메기를 먹게 되었다. 그는 아직 나를 의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한쪽에는 과메기 외엔 아무런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과메기 파이터'가,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과메기 파이터를 의식하는 또 다른 '과메기 파이터'가 존재하는 연구실의 전경이었다.





적고 보니 '인생의 리플레이 어워드'의 주인공들이라기엔 꽤나 일상적인 장면들이다. 사실 이 장면들은 내가 기억하는 K 선배와 J 선배의 마지막 모습들이다. 이 장면들 위에 새롭게 다른 장면을 덧씌우고 싶어도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누군가와 함께 한 마지막 장면들이 가벼운 책망과 가벼운 경쟁으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 때문일까. 헛된 줄 알면서도 나는 자꾸 이 장면을 되풀이한다. 다음 장면들을 자꾸 상상해 본다. 조금만 더 다정할 걸. 조금만 더 마음을 넓게 쓸 걸. 상이 뭐라고. 과메기가 다 뭐라고.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평범한 일상 속의 한 장면이 누군가와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후회 없을 장면이 되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정도이다. 아마 K 선배와 J 선배도 누군가를 그저 안아주 그인생에, 찬성할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K 선배에게는 "맞아요. 상이라는 거 쥐뿔 진짜 안 중요하더라고요."라고 말하고 싶고, J 선배에게는 과메기 쌈을 기막히게 하나 말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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