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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규 PHILIP Mar 03. 2022

[IBP][북스터디] 블랙스완 · 삼중의 불투명성

#제1부 #한봉규

I. 움베르토 에코의 반서재

움베르토 에코는 박학다식하고 재기 발랄하면서 통찰력을 갖춘 몇 안 되는 학자의 반열에 든다. (중략) 개인서재란 혼자 우쭐하는 장식물이 아니라 연구를 위한 도구임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중략) 

서재에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과 관련된 책을 채워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 지식이 쌓이고 읽은 책도 높이 쌓이지만, 서가의 아직 읽지 않은 책들도 점점 늘어나 겁을 먹게 한다. 진정 알면 알수록 읽지 않은 책이 늘어나는 법이다. 읽지 않은 책이 늘어선 대열, 이것을 반서재라 부르기로 하자. 

우리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개인 자산으로 취급하여 지키고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때 지식은 사회적 서열을 표시하는 장식물이다. 이런 지식관은 이미 알려진 것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서재에 대한 에코의 관점과 상반되며, 우리의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편견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자신이 배우지 않은 것, 경험하지 않은 것을 적은 '반 이력서'를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반이력서를 제출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서재에 대한 생각을 거꾸로 뒤집어 본 것처럼, 우리는 현존 지식도 거꾸로 뒤집어 보려 한다. 우리가 돌발 사태의 가능성과 읽지 않은 책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검은 백조가 나타난다. 이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여기, 아직 읽지 않은 책에 주목하고 자신의 지식을 대단한 자산이나 소유물 혹은 자존심 향상을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반 학자다. 이 반학자를 회의적 경험주의라고 부르기로 한다(42 ~ 43p 요약).
제1부 각 장들은 인간이 지식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경험적인 것보다는 이야기 구조를 갖춘 것을 왜 선호하는지를 다룬다. 

제1장에서는 검은 백조를 내 식대로의 이야기에 따라 풀어간다.

제3장에서는 무작위성의 두 가지 변이 양상과 그 둘 사이의 핵심적 차이를 살펴본다. 

제4장에서는 다시 검은백조에 관한 근본적 문제, 즉 눈에 보이는 것을 일반화하는 경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다룬다. 나는 또 동일한 검은 백조 효과 내에 존재하는 세 가지 속성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첫 번째는 확인 편향의 오류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서재의 아직 읽지 않은 책을 부당하게 경멸하는 경향(우리의 지식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만 쳐다볼 뿐 우리의 무지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도외시해 버리는 경향)을 일컫는 것으로, 이것이 제5장의 내용이다. 

두 번째는 제6장에서 다루게 될 이야기 짓기의 오류다. 이것은 이야기나 일화에 취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경향을 말한다. 

세 번째는 우리의'추론 과정에 개입하는 감정의 문제'로, 제7장에서 다룬다. 

네 번째는 말 없는 증거의 문제로 제8장에서 다루게 되는데, 여기서는 검은 백조를 보지 못하는 데에 역사의 장난이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보여준다. 제9장은 게임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것을 지식으로 삼는 데에서 비롯되는 치명적 오류를 다룬다(43 ~ 44p 요약).


검은 백조의 등장으로 그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공포심과 두려움을 겪은 나심 탈레브가 깨우친 것은 한 가지였다. 인간은 이미 알려진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는 검은 백조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탈레브의 자각이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서재를 방문한 대다수 사람들은 놀란다고 한다. 심지어 박사 님, 이 책을 다 읽으셨나요라고 묻는 일까지. 하지만 서재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 아니고 연구를 위한 자리라는 점을 많은 이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요컨대 드러난 현상에만 관심이 쏠린다는 것이다. 이는 꼭 방문자 만을 탓할 일은 아니고 지식인 스스로도 반성할 점이 있다고 꼬집는다. 


서재는 이미 읽은 책을 꽂아 놓고 쌓아두는 곳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읽지 않은 책들이 빼곡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읽지 않은 책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검은 백조의 출현도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탈레브는 읽지 않은 책을 가득 쌓아 두는 일이야말로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이라며 이 일을 하고 있는 지식인 서재를 움베르토 에코의 반서재라고 부른다고 했다. 또한 이 반서재를 지향하는 학자를 회의적 경험주의자라며 자신을 그렇게 칭했다.



II. 인간은 왜 검은 백조 출현을 알지 못하는가?


나심 탈레브가 1부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한 마디로 '인간은 왜 검은 백조 출현을 알지 못하는가? 아니 알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까닭 역시 단순하다. 인간은 보이는 것 또는 이미 알려진 일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인간은 그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했는지 그 원인을 아홉 챕터를 할애해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핵심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제5장 확인 편향의 오류, 제8장 말 없는 증거, 제9장 루딕의 오류가 그것이다.


그럼 나머지 여섯 개 장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 편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처럼 애매하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점은 그 여섯 개 장 얘기가 모호해서다. 나심 탈레브 자신이 이 책은 자서전이 아니라서 전투 장면(살아온 생애 유년기는 어쩌고 하는 투)은 생략하겠다던 호기를 높이 샀다.


한데 나(탈레브 자신)는 이렇게 엄중한 곳에서 살았다는 점을 알아야만 앞으로 내가 하는 얘기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논조다. 그래서 저자 의도를 따르는 독자의 도리를 다 하고자 그렇게 했다(세 번째 읽고 있는 중). 물론 여섯 개 장 모두가 형이상학 적인 듯 썰 인 듯 한 건 만은 아니다.


저자 자신이 나고 자란 레반트(지중해 동부 해안) 지역 역사를 생애적으로 또는 기록에 근거한 내용을 장황하게 말하면서 검은 백조를 보지 못하는 중요한 단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이름하여 ‘삼중의 불투명성’이 그것이다. 앞서 말한 인간이 보이는 것과 알려진 일에만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1부는 그 세세한 내용을 철학과 역사, 저널리즘과 과학 그리고 자신의 회의적 경험주의자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아래와 같다. 


1. 이해의 망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꿰고 있다고 저마다 생각하지만, 세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다(아니 무작위적이다).


2. 사후 왜곡, 마치 자동차의 후면경을 들여다보듯이, 우리는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야 관련 사건들을 돌아보게 된다(역사 책에 기술된 역사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보다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보인다).


3. 사실 및 정보에 대한 과대평가와 권위 있고 학식 있는 사람들이 겪는 장애로 인한 것들, 특히 그들이 '범주'를 만들어낼 때, 즉 '플라톤적 사고를 펼칠 때' 일어난다.


이 세 요인을 달리 말하면 '이해의 망상 = 확인 편향의 오류' '사후 왜곡 = 이야기 짓기 또는 말 없는 증거' '사실 및 정보에 대한 과대평가와 귄위 있고 학식 있는 사람들 겪는 장애 = 루딕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장, 8장, 9장을 1부 핵심으로 삼은 것이다.



III. 벼락 같이 일어나는 일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1987년 10월 19일('검은 월요일'이라 불리는 이날 뉴욕 증시와 홍콩 증시가 각각 22퍼센트, 45퍼센트 폭락함으로써 1929년의 금융공황과 비견-번역자 씀), 나는 맨해튼의 미드타운에 있는 투자인행인 크레디트 스위스 퍼스트 보스턴의 사물실에서 빠져나와 어퍼 이스트 사이드 쪽으로 귀갓길을 잡았다. 황망한 마음 탓에 발걸음은 마냥 느렸다. 

그날은 심각한 금융 재난이 터진 날이었다. (현대) 역사상 최악의 주가 폭락이었다. 정신적 외상이 더욱 심했던 까닭은 우리가 똑똑하기 이를 데 없는 플란토주의 경제학자들과 손잡고 (그들의 유치한 정규분포 방정식을 이용하여) 거대 규모의 충격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최소한 예견하거나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 시점에 재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뉴스에 자극받아 일어난 폭락도 아니었다. 

바로 전날까지도 사건의 발생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의 바깥에 있었다. 만에 하나 내가 그럴 가능성을 지적했더라면 나는 아마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은 단연코 검은 백조였다. 물론 그때 나는 그러한 표현을 몰랐다(67p).

검은 백조는 이렇게 출현한다. 과거 있었던 그 어떤 것으로도 검은 백조를 예측할 수 없다. 나심 탈레브가 윌리엄 샤이러의 '베를린 일지: 해외 주재 특파원의 기사' 책을 소개한 것은 이 책이 사건을 사후에 정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자체를 서술한 일지 형식이라는 점이 자신의 철학과 역사 이론 심지어 과학에 대해서 자신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얘기를 탈레브는 왜 꺼냈을까?


검은 백조 출현을 역사를 통찰해 찾으려는 회귀적 사고를 비판하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긴장이 점증하고’ ‘위기가 고조되는’ 투의 기록으로 검은 백조를 발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검은 백조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서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등장한다는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여겨달라는 투다.


검은 백조는 앞서 나심 탈레브가 '어퍼 이스트 사이드 쪽으로 귀갓길을 잡았다'라고 말한 그 순간 벼락같이 일어나는 일(역사가 나이얼 퍼거슨)이라는 점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Q 1. 반서재(읽지 않은 책이 읽은 책 보다 더 많아야 한다)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Q 2. 벼락 같이 일어나는 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그 경험의 배움과 통찰은 무엇입니까?



#나심탈레브 #블랙스완 #불확실성 #이해의망상 #사후왜곡 #과대포장 #움베르토에코의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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