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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봉규 PHILIP May 01. 2020

[삼삼한] 8개월·바나나우유



 잡히는 물건 모두를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눈을 뜨고 담으면 마음이 약해질까  눈을 감았다. 서랍 열고 닫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이대로라면 집안 물건 반은 처리할  있겠싶었다. 한낮 햇볕 탓인지 몸이 제법 후끈하다. 냉장고를 열었다. 물을 꺼내는 순간 안쪽 깊이 터줏대감처럼 똬리 틀고 있는 바나나 우유.  아이가 떠올랐다. 사연은 이렇다.


작년 9월 10일(화),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밤 10시 무렵 가장 세차게 내리는 빗발 때문에 옷은 흠뻑 젖었다. 집 앞 입구에 한 남자아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우산을 접자마자 쓰고 가라고 그 아이 손에 쥐여줬다. 아이는 걱정을 덜었는지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서는 내 집 호실을 재차 확인한 후 밝게 웃으며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추석을 쇠고 돌아온 날, 우산과 바나나 우유가 문 앞에 가지런히 놓였다. 그 아이였다. 고단함이 사라졌다. 기분 좋았고 기특한 행동이 고마웠다.


1천 원짜리 우산은 한 번 밖에 못쓴다고 3천 원짜리 이 우산을 사는 게 이득이라는 편의점 알바 말을 듣길 잘했다. 두 사람 추억이 이 비닐우산에 오롯한 것이 새삼 귀한 우산이 되었다.


바나나 우유는 그날 냉장고에 넣어 둔 것이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괜스레 웃음이 나오고 마음이 훈훈했다. 이것만은 버리지 못하겠다 싶었는데 이제 내 보내야 한다. 곧 터질 것 같다. 지난 8개월여 동안 내가 더 고마웠다.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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