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잡히는 물건 모두를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눈을 뜨고 담으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 서랍 열고 닫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이대로라면 집안 물건 반은 처리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한낮 햇볕 탓인지 몸이 제법 후끈하다. 냉장고를 열었다. 물을 꺼내는 순간 안쪽 깊이 터줏대감처럼 똬리 틀고 있는 바나나 우유. 한 아이가 떠올랐다. 사연은 이렇다.
작년 9월 10일(화),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밤 10시 무렵 가장 세차게 내리는 빗발 때문에 옷은 흠뻑 젖었다. 집 앞 입구에 한 남자아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우산을 접자마자 쓰고 가라고 그 아이 손에 쥐여줬다. 아이는 걱정을 덜었는지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서는 내 집 호실을 재차 확인한 후 밝게 웃으며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추석을 쇠고 돌아온 날, 우산과 바나나 우유가 문 앞에 가지런히 놓였다. 그 아이였다. 고단함이 사라졌다. 기분 좋았고 기특한 행동이 고마웠다.
1천 원짜리 우산은 한 번 밖에 못쓴다고 3천 원짜리 이 우산을 사는 게 이득이라는 편의점 알바 말을 듣길 잘했다. 두 사람 추억이 이 비닐우산에 오롯한 것이 새삼 귀한 우산이 되었다.
바나나 우유는 그날 냉장고에 넣어 둔 것이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괜스레 웃음이 나오고 마음이 훈훈했다. 이것만은 버리지 못하겠다 싶었는데 이제 내 보내야 한다. 곧 터질 것 같다. 지난 8개월여 동안 내가 더 고마웠다. 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