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은하수510

[은하수510] 철자법

by 한봉규 PHI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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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두 명이 아파트 단지 입구에 서 있다. “투표 좀 해 주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말을 한 아이는 야구모자를 썼고, 후드티를 입은 아이는 옷을 끌어당겨 시린 손을 감쌌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뒷짐지고 가는 할아버지 한 분이 스티커를 받아 투표를 했다. 그 뒤로 장바구니 든 아줌마, 타고 가던 자전거를 멈춘 고등학생, 학원 가방을 든 또래 얘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나도 그 무리에 끼었고, 두 아이 앞에 섰다. 왁자지껄 한 무리 가운데 몇몇은 '맞네! 틀리네!'하며 호호 깔깔댔다. 긴장이 감도는 어른의 투표소 풍경과는 다르게 아이들이 만든 투표장은 잔칫집 같았다.



“뭐 하는 거니?”


“자주 틀리는 맞춤법에 대해서 알아보는 거예요.” 야구모자를 쓴 아이가 답했다.


“학교 숙제니?”


“네, 다른 애들은 검색도 하고, 전문가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데, 우리는 이걸 택했어요.”


말이 오고 간 사이에도 스티커는 ‘베개’와 ‘배개’에 계속 붙었다.


“왜, 투표를 선택했니?”


“그냥 이거 해 보고 싶어서요!”


“그럼, 단어 선택은?”


“처음에는 '헹가래'로 할까 '행가래'로 할까 하다가, 헹가래보다는 베개가 쉬울 것 같아서요.”


“투표 끝나면 그다음은?”


“그다음은 스티커 개수 세고, 투표 결과가 왜 이렇게 나왔는지 그 이유를 쓰면 숙제 끝나요.”


후드티 입은 아이가 꼬치꼬치 묻는 나의 질문에 답하는 사이 야구모자 쓴 아이는 지금 막 투표를 마친 친구에게 ‘베개가 맞아!’라는 입모양을 만들어 줬다. ‘배게’에 투표하는 이도 꽤 많았다.


투표를 마친 나는 두 아이와 함께 투표하러 오는 사람을 맞이했다. 나는 멀거니 서 있었지만 두 아이는 사람들을 웃으며 반겼다. 태도는 몹시 공손했고, 기운도 넘쳤다. 숙제가 이리 즐거운 일일까 싶었다.


“투표해 주세요!”라는 목소리는 어둑해진 초저녁을 지배했다. 야구모자를 쓴 아이는 “투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며 배꼽인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 물었더니 괜찮다며 포즈도 취해줬다. 10m 정도 걸어간 후 뒤돌아 두 아이를 다시 봤다.


텍스트를 요약한 숙제와 두 아이가 쓴 숙제의 결은 사뭇 다를 것이다. 두 단어를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물론이거니와 학교에서 배운 정답 모두를 바르게만 쓰지 않는 현실을 두 아이는 기록할 것이다. 게다가 틀린 것을 사용해도 불편하거나 지적하는 사람이 없는 평온한 일상이 학교와는 많이 다르더라고 쓸 것이다. 거리에 나오지 않았다면, ‘베개’와 ‘배개’ 중 정답을 알고 끝낼 숙제다. 하지만 철자법 하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남긴 인상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시끄럽게 부딪히는 말들 속에 있을 것이라고 두 아이는 확신하지 않았을까 싶다. 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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