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을 선물 받았다. 출간 사인용으로 쓰시라며 원운식 소장(원 HRD)이 보낸 것이다. '펜'이 전하는 감성은 늘 아련하다. 가장 최근 기억은 영화 '82년 생 김지영'에서다. 남동생이 지영에게 펜을 선물했고, 지영은 그 펜으로 자기 얘길 쓰기 시작한다. 선물하는 이에게 펜은 추억이라면, 쓰는 이에게는 자기 기억이다.
여기에 어울리는 것은 없을까. 이것저것 찾아보다 '원고지'가 생각났다. 글짓기 숙제를 하려고 문방구로 달려간 기억, 입에 침을 발라 10장을 떼서 팔던 주인아저씨, 제목만 거창하게 내려쓰곤 한 장을 넘기지 못했던 그날 저녁이 흑백영화 한 편이다. 원고지 백미는 역시 빨간 색연필로 '띄어쓰기' '맞춤법' '들여 쓰기' 부호가 가득한 선생님 채점을 받은 날이다. 생전 처음 만난 부호는 어느 부족이 섬기는 상징 같았고, 숙제를 수정하는 일보다 부호를 익히는 일을 더 좋아했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문예반 시절, 한 선배는 원고지 뭉치를 들고 다니며 두어 글자를 쓴 원고지를 부욱 찢어 구기고는 바닥에 떨구곤 했다. 그 모습이 꽤나 폼 나 보였던 지 나도 따라 하곤 했다. 그때 알았다. 원고지는 양손으로 구겨 휙 던지는 맛이 일품이라는 것을 말이다. 10장씩 떼서 사던 나는 어느새 한 묶음 원고지를 들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시를 쓰기도 했고, 필사하기도 했다. 당시 그러니까 고등학생이었을 시절 자주 옮겨 쓴 시가 신경림 시인 시 '갈대'이다. 1956년 문학예술에 발표한 작품이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 그는 몰랐다' 이 마지막 구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시인이 고등학생 시절 썼다기에 더 마음이 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읽으면 눈물이 났고, 마음이 끓었다. 왜 그런지는 따지지 않았다. 시는 본래 그런 것이라고 시인이 내게 시로 말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해: http://blog.naver.com/36hjs/150014080311
원고지는 어느새 내 품에서 사라졌다. A4 용지를 쓰는 일이 많은 대학교 생활 때문 아닐까 싶다. 글짓기 숙제도 없었고, 원고지를 쓸 일 없는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원고지는 박물관에서 한두 번 봤을 뿐이다. 산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이렇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마냥 바라보는 일이란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아챘는가 싶다.
사인용 펜을 선물 받고 원고지를 떠 올리고 난 후 내가 한 일은 애플리케이션 원고지를 다운로드한 것이다. ‘백자 하루'. 개발자인 장성환 님은 어떤 이유로 이 앱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유료 구매를 알리는 메시지에 '캔 커피 하나를 마실 수 있습니다'라는 글이 내심 조용히 울고 있는 모양 같았다.
이번 출간한 책을 다방면으로 알리는 중, 요즘 갬성을 따라나서지 못할 바에 내 감성을 잘 드러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원고지가 안성맞춤이다. 실물 펜이 애플리케이션 원고지에 닿진 않지만 개발자가 적용한 글씨체가 펜글씨 같아 마음이 놓인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원고지 제 몸 우는 것을 달래는 심정으로 한 장 한 장 글을 써 내려가는 일이 새해 새롭게 찾은 내 일이다. 비 오는 날 이 일을 시작하니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1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