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부들부들 떨만 한 비가 내렸다. 비 그치면 계절 바뀌겠지 하며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팔방이 방음벽인 줄 알고 왔는데, 인스타그램 갬성이 넘치는 곳이었다. 듣자 하니 삼삼오오 이런 공간을 빌려 파티도 하고 Look Book 촬영을 한다는 것이다. 그 활동은 모두 SNS에 포스팅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코로나 대유행 시기 스트레스 푸는 방식이 꽤 흥미로웠다. 그런 공간에서 나는 온라인 회의 영상 촬영을 한다. SNS에 포스팅할 갬성 사진이 없을 것 같아 속 상도하다.
메이크업 박스가 삼단으로 촤촤작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림짐작해도 백여 가지는 족히 넘을 메이크업 도구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 많은 브러시 중에서 가장 아끼는 것은 몇 년 됐어요?" 인사말 다음으로 건넨 내 질문이 엉뚱했는지 좀처럼 들은 적 없는 얘기여서 그런지 메이크업 아티스트 분은 "네?"라고 짤막한 답변을 놓고는 곧바로 일을 시작한다. 잠시 연예인 기분을 만끽하라는 작가분 말씀은 듣기 좋았다.
메이크업 베이스를 바르고 컨실러로 감출 건 감추는 손놀림이 스무스하다. 파우치를 볼에 대고 눈썹을 다듬고 눈썹을 그린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내 모습을 상상하니 뭔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리모트워크 시대를 맞이하면서 내 얼굴을 이처럼 자주 많이 대면한 적이 없었다. 한데 그때마다 낯설었고, 주름이 세월만큼 고랑 고랑으로 이어진 흔적을 발견했을 때 열심히 산 훈장이라고 애써 말했지만 솔직히 애잔했다.
입술에 립글로스를 바르고 나서야 메이크업은 끝났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면서 남자는 역시 헤어스타일이지라는 말을 실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애잔하다며 넋두리한 내 모습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화이팅을 외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이런 마술이 따로 없다. 이 모습이라면 이 스튜디오 공간 곳곳을 누비며 갬성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릴만하겠다 .
하지만 현실은 뮤랄과 미로를 활용한 온라인 회의 동영상 촬영이다. 10분 남짓한 영상 열 개를 만드는 일이다. 산술적으로 100분이면 끝날 테지만, 7시간 공들인 끝에 마쳤다. 갬성 사진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SNS에 포스팅할 거리도 없었다. 촬영 내내 반복을 반복할 뿐이었다. 입에 단내가 날 때쯤 마친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고, 부들부들 내리는 비가 되레 시원하고 홀가분했다. 3개월쯤 후 메이크업 한 내 모습을 누군가는 듣고 보면서 애쓰셨네라고 한 마디 남겨 주신다면 이런 것이 참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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