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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한엄마 Oct 09. 2021

지구 감옥 속 내 육체를 길들이기

신나는 글쓰기 7기(6)

 금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더 보다가 ‘외계인 인터뷰’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베스트셀러 작가 채사장은 그 로즈웰 사건을 가지고 ‘예수 재림’에 맞먹는다고 얘기하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외계인과 이야기를 나눈 간호 장교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외계인이 지구 존재들도 영원히 사는 존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고 영생하게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영생이라는 기독교적 용어는 외계인 인터뷰에서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서 계속 사는 존재라는 것과 맞먹는 이야기다. 다만 우리는 항아리 같은 육체에 영혼이 묶여있고 이 지구는 행성 감옥 내지 학교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밖에 우리 시각으로 보이는 우주는 한계가 있으며 일단 우리는 우주에 소외당한 존재로서 다른 외계 존재들은 지구를 주시할 수 있지만 이 창백하고 푸른 점인 행성에 가둬진 영혼들은 그걸 전혀 모르며 이 작은 곳에서 아등바등하며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https://youtu.be/O6yv-XQjJ1o

 이 이야기가 황당하지 않은 이유는 요즘 열심히 보는 포항공대 출신 삼성 연구원에서 어떤 의미 있는 삶을 위해 혈혈단신으로 독립하여 사무실에서 최면 상담을 하는 유튜버 이야기를 들으면서다. 그는 절대 자기 생각으로 이 모든 이론을 정리한 것이 아니다. 그가 출판한 책 제목이 ‘무의식은 알고 있다.’다. 책 제목대로 그는 모든 생각을 상담자의 무의식을 통해 교훈과 배울 점을 도출하고 이를 구독자와 내용을 공유한다. 외계인 인터뷰가 진짜라는 전제 아래 있다면 이 무의식은 영혼이 자유롭게 지구를 탈출하려고 할 때 세뇌를 통해 다시 지구 육신에 갇힌다고 하는데 그 이전에 영원히 사는 영혼으로서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게 최면을 통해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https://youtu.be/T0Lw0ZpJeP4

그렇게 치면 영혼이 있는 나는 이번 생의 육체를 잘 길들이며 지내야 하는 것이다. 내 몸은 태어나서 그리 건강하진 않았던 것 같다. 지구 감옥 친화적 육체가 아닌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내 육체에는 별별일이 다 있었다. 어릴 때는 미친 듯이 울었다고 하고 사춘기 때는 얼굴에 여드름은 없었지만 팔 뒤편에 흉한 여드름이 가득했다. 뭐 그 이상에 대한 내 소형 감옥 육체는 잘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참 신기했던 것이 있었다. 자신 얼굴과 몸뚱이는 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남에게 대접받기 위해서 엄청나게 잘나 보이려고 꾸미려 노력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자유로운 부모님 밑에 있었다면 필히 맨 몸으로 다니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존 레넌의 아내 오노 요코나 몸 가지고 이상한 실험을 하는 사람이 내가 절대 아니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다. 만약 내 가정이 굉장히 진보적일 뿐 아니라 성적으로 굉장히 개방된 집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곳은 나름 정조 관념이 투철한 공간인 극동 아시아에 개발도상국으로 바르게 올바르게 사는 데 혈안이 된 부모님 앞에서는 그런데에 관심을 두는 게 쉽지 않다. 특히 나는 베이비붐 2세대로서 굉장히 많은 친구들과 생존 게임을 벌이고 있는데 그 생존 게임은 공부의 성적이었지 성적 매력이 기준은 아니었다.

 이렇게 내 몸은 공부를 위해 길들여졌다. 눈은 너무 많은 글자를 보느라 근시가 되어 안경을 끼게 되었고 필기를 하며 공부를 하는 바람에 오른쪽 세 번째 손가락은 굳은살을 넘어 살짝 휘어졌다. 일종의 영광의 흉터라고나 할까. 그렇게 나는 호모 스터디쿠스로 내 몸을 적응시켰다. 육체가 가진 본능 때문인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러나 결혼 후 임신은 쉽지 않았다. 병원 도움을 얻은 결과 중기 유산이라는 씁쓸한 추억과 난소혹을 얻었다. 그러고도 후손을 향한 본능은 멈추지 않았는지 아이 셋을 낳고 그렇게 키우며 살고 있다. 내 몸을 떠나 내 몸속에서 10개월 동안 커 왔던 아이들을 독립시키고 이들을 이 지구 행성에 잘 입식할 수 있도록 내 방식대로 길들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구가 사람을 길들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까? 우리는 2년째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와 싸우며 지내고 있다. 주변에서 보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생한 사람보다 코로나에 적응할 수 있는 유사균을 집어넣는 백신을 맞고 아픈 사람이 더 많이 보인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는 코로나 균이, 아니, 백신이 나를 길들이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그럴 때였을까? 2년 전 영국에서 오자마자 아파서 간 산부인과에서 아직 줄지 않고 5cm 혹으로 남아있는 난소 종양을 보고 왔다. 배란이 되어야 하는 시간에 장이 꼬이듯 엄청나게 아팠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고 걸어서 병원 가야만 하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근데 지금 그 고비가 넘어간 후에는 다시 그냥 버텨볼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픈 곳은 분명 자궁 내지 난소가 있는 장소이고 그곳에 꽤 큰 혹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근데 몸이 투명하지 못해서 내 장기 속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러면서 난소 혹에 대한 유튜브를 찾아봤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난소 종양을 제거하고 살아가는지. 나와 동갑인 어떤 유튜버는 난소암으로 밝은 모습으로 항암 치료 후기를 올리다가 안 올리고 있는지 7개월이 넘어가고 있는 걸 봤다. 항아리 감옥 또한 왜 이렇게 후졌니! 젊은 사람들이 혹을 달고 사는 게 너무 안쓰럽기도 했다. 이 영상을 보고 알게 된 것은 이 난소 종양이 몸을 붓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굶어서 살을 빼도 배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 암이었던 그 친구는 미혼이었기에 미친 듯이 살을 뺐는데 배는 들어가지 않고 딱딱한 것이 만져져서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근육이 생긴 걸로 알았다는 것이다. 이럴 때 끊임없는 긍정은 죽음을 재촉하기도 하는구나. 눈물이 나왔다.


나 또한 갑자기 난소가 아파 병원에 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10kg 정도 몸무게가 늘었다. 나 또한 이들이 말하는 대로 내가 잘못해서 살이 쪘다고 생각했다. 어떤 굉장히 교양 없는 아줌마가 같은 엘리베이터에 타더니 내 배를 보고 자기 배를 막 치면서 옆에 있는 불건전한 관계로 예측되는 사람에게 촐싹거리며 “나 뱃살 빼야 하는데, 자기야 내 배 나왔어? 저렇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나오는 순간 길들인 내 이성이 내 분노를 잘 조절해 주었다. 친정 엄마 또한 보면 살을 빼라고 난리다. 근데 엄마 또한 갑상선을 제거하고 살이 쪘다고 한다. 살이 쪄서 몸이 찐걸까, 아니면 몸이 아파서 살이 찐 걸까? 왜 살이 찐 게 아픈 게 아니고 육체를 잘 길들이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친정 엄마가 살이 쪘다고 하는 말이나 배가 나왔다고 뭐라 하는 것들이 무자비한 폭력으로 느끼는 건 내가 날 잘 못 길들였기 때문일까?


사실 내가 그때 꽤 큰 난소 혹을 보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건 최근에 간 사이코패스 의사 때문이다.

“제가 이 크기 혹을 꽤 오래 가지고 있어요.”

“암 아니에요! 이 크기로 암이면 당신 벌써 죽었어요.

 그러면서 웃었다. 같은 여성으로서 너무 모욕적이었다. 내 몸을 내가 걱정하는 것도 이렇게 비아냥 받을 일인가? 다시 그 사람을 보게 되겠구나. 결국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되겠지만. 최근 데이터가 그 병원에 있으니까 말이다.

생일날 복통이 가시지 않은 채 일어났다. 내 40번째 생일이었다. 내가 해 놓은 것이 무엇일까? 그 생각을 하기 전에 몰려오는 배의 통증 때문에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도 40살까지 버텼다. 더 버티자. 그리고 잘못된 부분은 고치면서 살자. 심각한 고통은 가셨지만 아직도 뱃속 부은 느낌은 그대로다. 도대체 내 배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https://youtu.be/BclmN7R6t1c


내 10대 때는 육신 탈출을 생각할 때도 있었다. 몸은 점점 커 가는데 그에 따라가야 하는 내 정신과 생각이 너무 버거워서 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꾹 육체 탈출 욕망을 잠재우며 또 다른 육체를 만들어내며 40년을 버티고 왔다. 알고리즘을 타고 보는데 내 아픈 과거 같은 영상들도 같이 떠 있었다. 당일 날 배 속에서 잘 놀고 있는 아기를 보고 온 그 당일 날 피가 살짝 비쳐서 그냥 걱정하지 않기 위해 그다음 날 또 병원에 가니 하루 사이에 아이 양수가 다 없어져 버려 출산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 나 또한 그렇게 애 둘을 잃었고 첫째 아이가 38주에 급히 유도분만을 한 이유도 갑자기 양수가 없어져 버려서였다. 양수가 없는 채 뻑뻑하게 세상에 나온 첫째라 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며 엑스레이도 찍어봤을 정도였다. 근데 또 신기한 게 둘째 셋째는 양수 부족은커녕 예정일 훨씬 지나서 태어난 아이들이니 내가 원래 양수가 없어지거나 조산할 체질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도 없다. 물론 둘째는 16주까지 콸콸 하혈을 했는데 그때 그냥 마음을 놨던 것 같다. ‘인연이 아니면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이미 조기 유산과 심정지에 양수 부족으로 힘들게 태어난 첫째를 경험한 이후라 그런 위험에 길들여졌었나 보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지구 감옥, 더 나아가 자신에게 배정된 육체를 길들이며 산다. 각자 최선을 다 하는 삶을 산다. 문제는 우린 이어져 있는 존재라는 데 있다. 나 자체는 얼굴이 보이지 않고 손과 발만 볼 수 있다. 거울이라는 반사 물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나 스스로를 평가할 방법이 없다. 아니다. 타인이 나에게 하는 대접을 통해 내가 어느 위치인지 깨달을 수 있는 건가? 어린 왕자에서 콧대 높은 장미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타인이 ‘아름답다’며 절절매는 행동을 보고 자신이 갑의 위치에 있음을 파악했다. 결국 혼자 남았을 때 아무도 자신의 갑질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을이 있어야 갑도 존재하는 것인데 말이다.

나이 사십. 나 또한 타인에게 충분히 꼰대로 보일 나이 때문인가 나름대로 개똥철학이 생겼다. 이 고된 지구 생활과 극동아시아의 자녀 욕심 가득한 XX유전자가 박힌 육체 속에 가둬진 영혼으로서 자신이 무엇 때문인지 나에게 갑이라고 생각하며 명령하고 무시하는 사람이랑의 접점을 최소한으로 둘 것. 이 갑질은 나를 모욕함으로 인해 내 영혼에 스크레치가 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도 그렇고 앞서 얘기한 천박한 아줌마처럼 직접 대놓고 얘기를 하지 않지만 풍겨져 나오는 ‘나는 쟤보다 나은 존재다’라는 수단으로 위안을 얻는 사람은 가뿐히 나 또한 영혼으로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우린 감옥 동기로서 동정심이나 최소한의 인권(육체를 가진 자로의 예의)은 존중하는 선에서. 이게 내가 지구에서 나름 나 자신을 길들이는 방식이다. 다 힘들게 살고 있다. 제발 열심히 버티는 사람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말자.


관계를 맺는 초기에는 서로가 꽤 서먹서먹한 편입니다. 서로를 모르니 탐색하는 시간도, 서로의 성향을 이해하는 시간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관계에는 ‘길들이다’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관계에는 서로의 시간이라는 문장을 내포하게 됩니다. 길들이다, 이 단어에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쨌든 관계가 생긴다는 걸 전제 조건으로 합니다. 하지만 길들인다는 측면은 한쪽이 다른 쪽을 물들인다는 측면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다. 한쪽이 자신의 색채를 양보한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한쪽은 자신의 세계를 잃어가고 한쪽은 더 세계가 뚜렷해진다는 얘기겠지요.

길들이다, 는 이렇게 사물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사람뿐만 아니라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길들이다,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여러분에게 길들이다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경험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친구들을 찾고 있어.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그건 모두들 너무나 잊고 있는 것이지.」 여우가 말했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너는 아직 내게 세상에 흔한 여러 아이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나는 네가 필요 없어. 너도 역시 내가 필요 없지. 나도 세상에 흔한 여러 여우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한 여우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러나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하게 되지. 너는 나한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야. 나는 너한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고… 「사람들은 이제 어느 것도 알 시간이 없어. 그들은 미리 만들어진 것을 모두 상점에서 사지. 그러나 친구를 파는 상인은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가 없지. 네가 친구를 갖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 줘!」 여우가 말하는 〈길들인다〉는 것은 자기 아닌 것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그것의 삶 속에,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있게 하는 일이다. 존재가 세상에 진정한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은 권력이나 소유나 명성이 아니라 이 길들임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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