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철학으로 ‘변’해 다시 ‘태’어나는 아줌마 이야기
사실 ‘나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란다. 델피 신전 기둥에 새겨 있던 글귀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한 사람일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가 ‘자신이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본인 자신에 대한 진실일 뿐이었다고 한다. 과연 나는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난 어느새 마흔이란 나이가 되어버렸다. 중년이라고 해도 반박할 수 없는 나이. 이때쯤 내 아빠는 들어가지 않으려는 청바지를 입으며 ‘나는 아직도 청춘’이라 외치며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아버지를 주책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무리한 시도라는 생각은 했었던 것 같다. 힘없이 의술이라는 기술에 매달려야 했을 그때부터 아버지는 ‘나는 지금도 청춘’이란 말을 그만하셨던 것 같다. 병원이란 곳은 그런 곳이다. 사람을 한없이 작게 만들고 굳이 사람이라는 존재가 연약하고 하찮다는 걸 인정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장소이다.
철학은 어쩌면 그런 병원과 비슷한 방향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약해졌을 때에야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정말 스스로 의지가 약한 사람들은 종교라는 허울을 쓴 사기꾼들의 달콤한 말에 휘말려 마음뿐 아니라 돈과 몸까지도 던져버린다. 종교에 적잖이 상처를 입은 영혼이 다시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는 건 종교가 아닌 철학이다. 철학자들의 사유를 통해 내면을 다시 다지는 작업.
말이 이렇게 번드르르하긴 한데 솔직히 나는 정작 철학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런 내가 정작 빠져버린 대상은 최근 군대에 입대한 ‘강태오’ 배우다. 생애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을 ‘더캠프’라는 앱을 깔고 매일 내 띠동갑 조카뻘인 강태오 배우에게 편지를 가장한 일기를 쓰고 있다. 40대가 무슨 이런 주책인가? BTS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나다. 그래도 HOT의 강타를 좋아했고 새댁이었을 시절 옥택연과 이승기를 보며 살짝 마음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이들도 결국 기대보다는 실망이 더해 가고 이들이 짝을 만났다고 해도 심드렁하다.
강태오 배우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주인공 우영우와 러브 라인을 형성하는 남자 주인공이다. 참으로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억지면 억지인 인연의 고리가 떠오른다. 우영우 배역의 박은빈 양이 출연했던 ‘태왕사신기’ 숙소인 제주도 피닉스 파크에 있었을 때다. 밑에서 콧소리를 내며 “욘사마”를 연신 외치는 일본에서 온 사모님들을 숙소 바로 밑에서 구경했다. 도대체 왜 그래? 사회 준비생이었던 나는 그렇게 40대 언저리 일본 사모님들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주의 이치를 탐구한다는 분이 발밑의 웅덩이도 못 보다니요!
나는 절대 저러지 않으리라 비웃음과 함께 결심도 해 보았다. 결국 나는 사모님들과 같은 주책과 주접을 떨고 있다. 우주 전체의 비밀을 탐구하던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가 발 앞의 돌에 걸려 넘어져 놀리는 시녀의 비아냥이 꼭 나에게 던지는 신랄한 비판 같다.
왜 나는 그를 추앙하는가?
그렇게 15년이 흘러 그 드라마 속 아역 배우는 멋진 성장 드라마의 원톱으로 자라 나의 퇴근 후 시간을 모조리 뺐어 버렸다. 결국 관심을 집중시킨 존재는 정작 ‘우영우’가 아닌 그 주인공 뒤에서 묵묵하게 도와주었던 존재하지 않은 듯 존재감을 내비친 국민 섭섭남 ‘이준호’였다. 그는 마치 소크라테스에게 빠져 남은 생애를 그가 남긴 이야기를 쓰고 연구하는데 바친 플라톤 같았다.
극 속 ‘이준호’의 억울함이 나를 자극했던 것 같다. 세상에 대한 억울함, 내 진심을 알아주지 못하는 헛헛함. 그런 내 감정을 그가 스스로만의 세상으로 가득 찬 주인공인 우영우를 사랑하면서 참다 참다 표현하는 그 모습 속에 또 다른 내 모습을 봤다. ‘섭섭하다’라는 말속에 많은 여성들이 나처럼 설레었을 것이다. 영우의 세상은 고래와 법률로 가득 차 있는데 좋아하는 그의 마음을 아주 조금 알아버린 그 순간 참다가 새어 나오는 그 모습은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 속에 있고, 짝사랑하는 그 누군가 속에 있고, 또 꿈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지만 좌절로 계속되는 사람들 속에 들어있다.
영우와 준호가 회전문을 통과하는 행위는 마치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기초로 플라톤이 동굴에서 이데아가 있는 밝은 세상으로 나가는 행위 같았다. 테스 형(소크라테스를 친근하게 부르는 은어다.)의 죽음 이후 플라톤은 꾸준히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길 끊임없이 기다리고 기다리지 않았을까? 극 속에서 우영우를 이준호가 기다렸듯이 그리고 내가 새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 군대에 있을 강태오를 기다리듯이.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20년 전에 전남친, 현 남편을 군대에 보내고 제대까지 기다린 성공한 곰신 출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남자 친구가 훈련소 들어가는 모습도 본 적 없고 제대하는 모습도 못 봤으며 정중히 초대했던 카투사 파티도 참석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남편을 사랑했고 남편도 나를 사랑했기에 아직까지 둘이 살고 있는 것이겠지? 오히려 울며불며 매주 오가며 드라마를 찍은 커플들은 각자 다른 연인을 만나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사랑(세상)은 변한다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 그들은 사랑(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파르메니데스였던가?
나는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우리 둘의 관계는 언젠가 바뀔 수도 있음을 생각하고 조심했다. 반면 파르메니데스 같은 로맨틱 곰신이었던 친구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변하지 않음으로 고정 불변하는 사랑임을 전제로 삶을 움직였다. 이상하게도 사람과 환경은 계속 변한다는 나는 관계 변화 없이 지내고 있고 반대로 사랑의 고정불변을 믿었던 주변은 그 사랑에 실망해 다른 사랑을 찾아 다시 상대를 다시 만나는 선택을 했다.
개인적으로 난 헤라클레이토스의 모든 건 변한다는 전제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유익했다. 세상이 더 변해서 통일이 되고 평화가 유지되어 더 이상 군대가 있을 이유가 없는 세상이 도래하는 게 더 나을 테지만.
나는 이렇게 계속 내 생활과 함께 내가 공부했던 철학적 요소들을 녹이며 글을 쓸 예정이다. 내 현생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철학적 논거를 위해 억지를 짜내고 있는지는 독자가 판단할 문제다. 철학을 향해 내 시간과 연결한다는 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철학자와 이론은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안광복)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