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벨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크를 재빨리 쓰고 현관문을 열었다. 30분 전에 통화했던 부동산 사장님이 손님을 모시고 들어왔다.
“재택근무하시나 봐요?”
그녀가손님을 안방으로 안내한 후 거실 테이블앞에 서 있는 내게물었다. 복합기에서 노트북 화면의PPT자료가드드득, 소리를 내며받침대 위로내려앉았다.
“아, 네에…”
나는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두 번째 방문한그녀의 미소에서 친근감이 느껴졌다.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던진 ‘재택근무'라는 단어가내마음을 흔들었다.
노트북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잡동사니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비칠까. 휴대폰 거치대, 돋보기안경, 이어폰, 작은 수첩과 문구류, 책, 프린터가 노트북을 에워싸고 있다.테이블 옆으로 여섯 개의 의자가 흰색, 갈색으로 짝을 이루었다. 나는 벽을 등지고 노트북을 바라보는 흰색의자에 즐겨 앉았다.옆에 놓인갈색 의자에 일곱 권의 책을 층층이 쌓아 올려놓았다. 나머지 의자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했다. 6년 전에 이사 올 때만 해도 소파 대신 6인용 테이블을 거실 중앙에 배치하며 팀스터디할 생각이었다.
부동산 사장님이 자신의 집처럼 손님에게 다른 방들을 보여주었다. 나는테이블 너머 거실에 놓인 물건들을바라보며, 찰나에 깃든 생각을붙들었다. 거실 창가와 벽면 안쪽에 놓인 안마의자, 공기청정기, TV, 자전거, 5단책장이 기역자를 그리며 시선을 이끌었다. 사다리 모양의 어른 키높이 책장엔 빼곡히 꽂힌 책들과 C브랜드생활용품이 절반씩자리를 차지했다. 시선이머무는 곳곳에 추억이 깃들었다.
“잘 봤습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상념에 빠져있는 나를불러들였다. 손님을 뒤따르던 부동산 사장님이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내게 물었다.
“선생님이신가 봐요?”
“아, 네에…”
여전히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지금 정체성 혼란에 빠져 있다.누군가는선생님이라부르고 누군가는사장님이라고불렀다. 하지만 정작 내 마음은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기억의 조각들을 불러 모아앞으로 항해할 인생의 항로를 가늠해 보았다.유년시절을 지나무탈하게사춘기를 보내며인생의 1막이평온하게 흘러갔다. 성인이 되어 공부를끝마치고직장생활을했던 인생의 2막도그만하면 흡족스러웠다.인생의 3막에 이르자,기억의 조각들이이어지지 않은 채 멈추었다.인생의 변곡점으로 돌아가 스스로를직면해야 할 때가 온 것일까.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곳에서 다시 시작해, 라는.
나는 서른이 되던 해 봄에 결혼했다. 직장 생활에 지쳐가고 있을 즈음이라결혼과 육아를핑계 삼아 전업주부가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동갑내기인 남편은 직장생활3년 차였지만 모아둔 돈이 없었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내드리고 학자금을 갚았다. 방 두 칸짜리 빌라 전세보증금과 결혼식 비용을 모두 대출로 충당해 가정을 꾸렸다.박봉의 급여로 두돌이 되어가는 아들을 키우며 살던 어느 날이었다.
거울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을 한 내가 거울 밖의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장면이머릿속에 각인되었다.기대했던 인생의 항로를벗어나고 있었다.뜻대로 나아가지 않는 게 인생일까.가슴 깊은 곳에서부터통증이일며온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뭐든 시작해야 했다. 거울 속무채색의 얼굴을걷어내야했다. 남자의 아내, 아들의 엄마라는 배역에 그칠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이커져가고 있을즈음이었다. 결혼 전에 다녔던 직장 선배가 같이 일을 해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단 한 번도 꿈꿔보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마치 운명이준비해온 기회로받아들였다.서른세살이 되던 해,어쩌다 사장이 되었다. 인생의 새로운 무대의 막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