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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Q Oct 16. 2020

여행은 이렇게 긴 여운을 남기는 것

한국, 안동 

계획은 도착해서 만들어가는 거야


여행이 계획대로 이루어졌다면 지금쯤 우리는 강원도 양 떼 목장에서 양에게 밥을 주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순탄하게 여행이 흘러가지만은 않는 법. 첫 여행부터 배우게 되었다니 살짝 가혹하긴 하다. 그런데 여행은 현명했다. 여행자가 마음먹고 계획하기 나름이라는 것 또한 가르쳐주었다.


오후 늦게 안동역에 도착해 곧장 하회마을로 향했다. 둘 다 안동 하면 하회마을을 알고 있어서 이견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하회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또 한 두 방울씩 비가 내린다. 이번 여행에서 비를 안 만난 건 첫째 날 뿐이란 걸 마지막까지 확인시켜주는 날씨! 가방에서 마지막 우비를 꺼내 입었다. 비 오는 하회마을은 아주 조용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릴만큼 고요했다. 배가 고파 꿀타래를 사 먹으며 이 곳을 둘러보았다. 하회마을에는 문이 굳게 닫혀있어서 거의 밖만 둘러보았고, 마을을 걷다가 조금 트인 공간에 가고 싶어 걸어서 부용대 가까운 곳으로 왔다. 촉촉한 길이었다.


안동에서도 우비와 한 몸이 되어 이곳을 둘러봐야 했지만 우리밖에 없어서 나중에는 재밌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다녔다. 빗물을 머금은 나뭇잎들은 더욱 선명한 초록색을 띄었다. 넓은 들판은 연둣빛이었고, 가까운 나무는 진한 초록색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지만 차츰 비가 잦아들어 우비를 손에 들고 걷기도 했다가, 늦기 전에 버스정류장으로 왔다. 그런데 버스를 놓쳤다. 그렇지만 그 덕에 기다리는 시간 동안 가족에게 줄 귀여운 하회탈 모양의 열쇠고리를 선물로 샀다. 엄마 아빠에게는 하트 속 웃고 있는 하회탈과 각시탈 열쇠고리를, 동생에겐 환하게 웃고 있는 하회탈 열쇠고리를. 기다리던 버스는 우리를 재촉하지 않으며 뒤이어 왔다. 하회마을을 제대로 보지 못해 아쉬운 느낌이 들었는데, 그로부터 7년 뒤 안동을 다시 찾아 제대로 여행했다. 그 이야기는 차차 이후에.


하회마을에서 곧장 안동찜닭 골목으로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거의 9시간 가까이 밥을 먹지 못해 무엇이든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상태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찜닭골목으로 직행했다. 둘이서 소자를 시켰는데 크기가 엄청난 그릇이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 가득 들어 있는 찜닭.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양에 압도되었는데, 먹을 수 있을 만큼 거의 다 맛있게 먹고 나왔다. 아까보다 한결 느려진 걸음으로 시내 빵집에 갔다. 과일빙수를 시키고 나서 이 곳이 빵과 팥빙수가 유명하단 걸 알았다. 더욱 느려진 걸음으로 시내를 둘러보았다. 밥 먹고 나서 우리는 다시 조금씩 내리는 비에 아까 입던 우비를 챙겨 입고 안동 시내를 걸었다.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이렇게 우비 입고 시내를 둘러보는 것도 여행 자니까 가능한 것 아닐까 하며 걸어 다녔다. 세 번째 우비를 꺼내 입을 정도가 되니 이 모습에 스스로 익숙해진 터였다. 시내를 둘러본 후 역 근처 내일로 찜질방에 갔다. 


어느덧 내일로 여행 마지막 밤이다. 우리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 노곤노곤 피로를 달래주었다. 추억을 되새기고 다음 학기 이야기를 나누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후 잠이 들었다.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에 쉽게 잠이 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잘 자' 하는 순간 숙면을 취했다. 다음 날 친구는 아침 7시 기차로 수원에 갔다가 집으로, 나는 10시 30분 기차로 집으로 갈 예정이었다. 네 번의 밤 중 가장 잘 잔 잠을 깨고 나니 친구가 가고 없었다. 게다가 2층 전체에 자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여유롭게 씻고 초코우유로 아침을 대신한 후 기차역으로 향했다. 


스무 살, 내 인생 첫 여행. 전라도에서 시작해, 충청도를 거쳐 강원도를 찍고, 경상도에서 마무리하는 여행. 첫날 빼곤 전부 비를 만났고, 점점 더 무거워진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걸어야 했지만 어딘가 내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아빠가 쓰던 등산가방을 메고,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모자를 쓰고, 우비를 입고, 누가 봐도 '나 여행자요'하며 다녔던 시간이었다. 지역마다 다른 말투, 음식, 분위기, 공기, 여행지를 하나하나 피부로 와 닿게 느꼈던 여행이었다. 이 여행 동안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이 더욱 많이 생겼다. 웬만한 거리는 뚜벅이로 걸어 다녔던 길의 느낌도 좋았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즐거웠던 기억이 더욱 오래 남아 있다.


첫 내일로 여행을 잘 마친 후 일기장에 마지막 한 줄을 남겼다. 

"여행은 이렇게 긴 여운을 남기는구나." 


2011, 안동의 하회마을 안에서, 비가 와서 더욱 조용하고 고요한 이곳 
2011, 안동 하회마을, 내리던 비가 잠시 그쳤을 때, 5일간의 국내 기차여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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