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흥망성쇠와 함께한 내 이야기
이 글 역시 편의상 반말로 진행되며, 탈고 없는 초본으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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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마케팅을 시작하지 않았다. 나는 0년 차 때부터 팀장, 실장급으로 숫자를 매니징 하며 그로스를 익혔다. 나는 나보다 5년, 10년 경험이 많은 분들과 팀을 흡수했고.. 스타트업에서 무늬만 C레벨로 지내기도 했다..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스타트업이 있다. 꼭 초창패나 청창사 같은 유수의 곳을 거치지 않더라도, 꼭 프라이머 같은 투자사의 액셀러레이팅을 받지 않더라도. 아무도 모르지만, 자생해서 매출을 내고 있고 혹은 무섭게 성장하거나 독특한 DNA를 갖고 있는 수많은 스타트업이 있다...
1. 신입, 주니어 시절부터 전사 모든 지표를 관리하기
# 스타트업 E사 이야기
그 대표는 왜 나한테 회사의 모든 숫자를 보여주고 맡겼을까? 나는 그저 그 서비스가 재미있어 보여서 마케팅의 전략적인 사업 구조를 조금 준비해 갔을 뿐인데, 사회에서의 실무 경험이 없던 내게 회사의 통장 잔고부터 AARRR의 모든 지표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책임지게 했다.
나는 매월 경영진 앞에서 영업 회의 보고를 하고, AARRR의 성과와 루스에 대해 피드백하고, 마케팅 스케일업의 지표와 컨텐츠를 점검하며, 리텐션 팀의 주 단위 가설을 매니징하고, 개발팀을 비롯 전사 20여 명의 조직 구성원 팀들의 그로스 임팩트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회사는 시리즈 A 유치에 성공했고, 나는 당시 그 회사의 대표와 다른 한 명의 코파운더 사이에서 일하는 스트레스로 구안와사(일시적인 안면마비)가 오곤 했다.
매월 1억 가까이 마케팅비를 추가 소진하며 매출과 유저 볼륨을 키워 가는 동시에, 여러 투자사가 사무실에 미팅을 왔다. 나는 농협, 대교 등 여러 투자 심사 담당자와 커뮤니케이션하며 우리 측에 유리한 지표를 다듬어 전달하는 역할까지 하게 됐다. 때론 외부의 언더 바이럴 여론 조성 공격에 대한 대처를 해야 했고, 마케팅과 컨텐츠 성과가 계속 개선되다가 떨어질 때에는 쓴소리를 해야 했다.
수많은 퍼널을 개선하고 검증하는 일을 하며 당시 대표에게 받은 책 하나가 생각난다. <린 스타트업>이라는 책 한 권이었는데, 그 책에는 그로스해킹으로 이어지는 여러 맥락들이 담겨 있었고, 우리는 결제 페이 하나를 붙이는 순간에도 구매전환율을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마케팅 매체를 붙이고,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 프로모션으로 얹는 모든 과정에서 수많은 바리에이션 소재들과 기획물들을 쏟아내곤 했다.
나는 합정 5번 출구 근처 6층짜리 통 빌딩 사무실을 임대하는 대표의 의사결정에 반기를 들었었고, 여성 유저 중심으로 여론을 만들고 있는 경쟁사에 대한 모니터링과 팔로업을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었고, 회사는 통장 잔고가 비어감에도 코앞에 둔 시리즈 A 유치를 위해 매출 볼륨의 J커브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도 신경을 써야 했고. 동아리 같은 스타트업 조직이 욕심 많은 각 한두 명의 축들로 인해 이어지고 성장하는 놀라운 경험. 그 정도로 축약할 수 있겠다.
이 조직은 돌연, 전사 모든 직원을 내보내는 태세로 들어갔다. 당시 나는 통장 잔고를 보고 있었으니 먼저 발을 뺐다. 아마도 지금 아예 다른 서비스로 활동하는 이곳은, 당시 투자 조건 중 무언가가 걸려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로서는 사실 굉장히 값지고 놀라운 그로스 DNA를 얻은 경험이다. 지금 내 모습으로 결과만 보자면.
2. 본격 그로스해커로, 투자 없이 우린 알아서 매출 냅니다.
#스타트업 L사 이야기
당시에는 그로스해커가 매우 귀했다. 나는 한참 샛별처럼 떠오르던 모 스타트업의 이직 제안을 거절하고, 아무도 모르는 이상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곳에 합류했다. 더 많은 권한으로 일을 할 수 있었고, 정말 괴짜 같던 그 회사의 대표가 내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정말 똑똑하고 비즈니스에 기민했다.)
모든 스타트업들이 나름대로 TAM, SAM, SOM을 정의한다. 고객들의 LTV 전반을 확보하기 위한 사이클을 투자사나 보증기금처에 제안하고 시드를 확보한다. 이 회사도 그런 걸 시도했지만, 좋은 투자 유치 조건을 만들지 못하다가 결국 자생 매출로 굳이 투자 없이 잘 크는 회사가 되었다. (물론 스케일업 관점에서는 다르지만.)
내가 처음 이 조직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그로스해커가 왔대. 드디어 우리한테도 마케터가 붙는대. 뭔 해킹을 한다는데. 쟤는 마케터도 아니고 뭐지?" 뭐 대충 이런 반응이었다. 그만큼 그로스는 국내에서 생소했고, 당시 그 회사의 대표와 나는 모두 그로스 관점에 굉장히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핏이 잘 맞았다. (사실 내가 했던 모든 게 마케팅이고 브랜딩인데. 거기에 모두 정량적 측정 지표를 붙이고 결과를 회귀했을 뿐)
신사업은 거창한 인력이나 마케팅비 없이도 잠재고객을 600% P 이상 늘렸고, 매출은 1년 안에 몇 배가 성장했고, 구매 전환율은 최대 50%를 만들고, 객단가는 최초 10만 원에서 18만 원에서 개선했으며, 리텐션의 단가는 몇 백 만원까지 올라갔다. 새는 구멍 없이 비즈니스와 마케팅 퍼널이 완성됐고 이제 돈만 부으면 되는 시점까지 간 것이다.
나는 C레벨이 되었다. 사실 무늬만 C레벨인데. 입사한 지 2달 안에 전사 KPI를 혼자 달성했고, 6개월 안에 팀 구축을 시작함과 동시에 기존의 브랜드/마케팅 팀을 흡수했다. 기존의 임원이자 CMO는 자연스럽게 드롭되었다. 그리고 8-9개월 차에는 KPI PO라는 직과 20명에서 50명대까지 성장한 전사 조직의 애자일과 그로스 프로젝트 전체를 총괄 매니징하는 역할을 하게 됐다. 직접 관할하는 구성원은 14명 정도가 되었다.
당시 나는 일에 미쳐 있었다. 오글거리지만 정말로 그랬다. 매주 화요일에는 새벽 2시까지 임원회의가 반복됐다. 내가 하는 일은 전략, 기획, SNS, 광고, 마케팅, 홍보, PR, 지원사업, 그로스, 데이터, 인사, OKR, 조직문화 등등으로 미친 듯이 확장됐다.
지금이야 그로스마케팅이라는 업계 새로운 분야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 그로스해킹은 비즈니스 자체였다. 그러니까 마케팅 퍼널이 아니라 직전 회사에서도 비즈니스 퍼널 자체를 만들면서 마케팅을 셋팅한 것이다. 정답은 없다. 임팩트와 밸류가 크다면, 그로스 조직이 컨텐츠 조직이 될 수도 있고 광고 조직이 될 수도 있고 영업/TM 조직이 될 수도 있는 거다.
그때에는 정말 내 삶이 없었다. 딸내미 해피를 돌보는 시간이 적어졌고 당시 여자친구와의 불화도 생겼다. 반면에 성과에 대한 집착과 불안증은 커졌고 애자일을 표방하는 조직 내부에서의 정치와 알력도 더 커졌다. 이때까지 나는 단 2개의 스타트업, 대학 시절을 포함하면 단 3개 정도의 스타트업을 경험한 초반 시기였는데, 그때 내 생활을 비롯해 너무 많은 득과 실을 경험할 수 있었다.
3. 월 10억 마케팅비 쓰는 조직에서 40%를 담당하며
#스타트업 Q사 이야기
그로스해커로 계속 일을 하니 드는 생각 단 하나. '이럴 거면 내가 내 회사 차려서 그로스 하지.' 그래서 당시 커리어패스에서 몸값을 올리기 좋은 퍼포먼스/CRM마케터 쪽으로 방향을 틀고 더 큰 회사, 더 큰 시장을 찾아갔다. (생각해보니 4번 공동창업이 먼저다.)
당시 구글 코리아 5대 우수 광고주, 메타 코리아 15대 우수 광고주로 뽑히는 브랜드이자 네이버에서 시리즈 B를 100억대로 유치한 100여 명 조직의 스타트업이었는데. 역시나 나에게는 그로스 업무와 다른 일도 주어지긴 했다.
이 전에도 퍼포먼스는 같이 병행해 왔지만, 이곳은 당시 대행 업계에서도 인정하는 퍼포먼스 잘하는 인하우스였다. 그만큼 그로스 전반을 두루 하던 출신인 나에 대한 초반 걱정들이 보이기도 했는데. 다행히 나는 월 4-5천 지출과 ROAS 150% 정도로 버티던 구글 DA와 당시 디스커버리, 유튜브 캠페인들을 크게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브랜딩 매체를 태울 때를 제외하고는 월에 3억 내외까지 증액을 성공했고 ROAS도 1.5배-2배까지 키울 수 있었다. 모두 셀프서빙이었다.
퍼포먼스 조직은 단 3명이었고, 컨텐츠 조직은 10명 가까이 되는 구조였다. 나는 그곳의 퍼포먼스 담당자 중 한 명으로 있었지만 구글 DA의 프로모션, USP 기획 등을 전반적으로 리딩했고, 모든 전 매체에 투입될 수 있는 시즌성 프로모션 기획들로 파트를 넓혀갔다. 당시에는 풀 퍼널이 굉장히 유행이었고, 나는 메타 중심의 분위기에서 구글 유튜브 쪽으로 업무 집중이 될 수 있는 협업 구조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곳은 볼륨이 커서, 지표가 팍팍 튀는 재미가 있었다 선하고 능력 좋은 사람들을 모아놓은 곳이었고, 나를 채용한 C레벨 분의 명석함을 많이 배우며 지금까지도 찾아뵙는 연이 되었다. 당시 나는 광고가 물건 판매가 아닌, 고객 가치라는 맥락 그리고 컨텐츠로 다가갔을 때 얼마나 브랜드에 큰 레버를 줄 수 있는지. 이 자체가 어떤 브랜딩과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지 크게 경험할 수 있었다.
풀 퍼널의 Upper 단에 돈을 단순히 붓는다고 해서 그 모수가 다 Middle-Bottom으로 이어져 전환 매출로 잡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1시간에 5천만 원짜리 매체 부킹을 할 때에도 내부에서 얼마나 많은 기획과 의논이 오갔는지 모른다.
CRM은 100만 명 이상 회원이었고, 단순히 쿠폰 플레이를 하는 게 아니라, 고객 군 별로 다 다른 프로모션과 골든 타임과 코호트를 관리하는 그로스의 영역이었고 개발 조직, 여러 유관부서(TM 세일즈 팀을 포함)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얼마큼 잘 풀어나가느냐의 PM적인 역할도 중요했다. 똑똑한 조직에서 필요한 일만 하면서도, 숫자가 나오면 그 누구도 크게 터치하지 않는. 스타트업 DNA 그대로 규모가 커지고 있던 곳이었다.
4. 와튼, 골드만삭스 출신 대표와 공동창업하기
#스타트업 I사 이야기
한참 스타트업 HR 전문 플랫폼 로켓펀치가 잘 되던 시절이었다. 나는 지금 핀테크 플랫폼으로 크게 성공한, 이미 연쇄 창업 커리어를 계속 잘 이끌고 있던 모 대표님의 이직 제안을 다시 거절했다. 인간은 실수를 반복한다. 또 한 번 더 힘든 고생길을 택한다...
당시 조인하게 된 스타트업의 대표는 나보다 한 살, 두 살 정도 어린 동년배였다. 하지만 가방끈으로는 나의 5,6배 정도는 되는 수준이었고. 엔젤 투자로 들어온 그의 친구들도 모두 아이비리그를 거쳐 여의도나 월가 등에서 활동하는 뱅커들이었다. 이때 벤처 캐피탈리스트도 몇 명을 알게 됐으니, 생각해 보면 참 귀한 인연이었는데. 당시 나도, 그들도 너무 부족했다.
컴퓨터 4대, 책상 8개. 무드등 4개. 우리는 이렇게 시작했다. 언주역 부근의 모 사무실에서 M이 VP를 만들고, BEP 시뮬레이션을 공유하고, 초기 앰배서더들과 홈페이지를 만들고, 강의 컨텐츠와 홍보 컨텐츠를 개발하고, FGI 인터뷰부터 색다른 UGC형 프로모션까지 참 많은 것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사업성 검토에 대한 플랜과 지표도 명확했다. 우리는 단순히 결과 지표로 고객 몇 명, 매출 얼마라는 계산이 아니라, 최초 마케팅비의 세분화부터 브랜드 가치체계 그 이후의 각 전환율과 단가 등을 모두 미리 계산했고. 결제를 꼭 하지 않더라도 가입 이후로 확보된 잠재고객들을 대상으로 사업모델을 디벨롭할 수 있는 여지까지 모두 준비해 뒀다.
나는 당시 CMO이자 그로스 리드로 합류하며, 베스팅 조건으로 지분 10%를 받고, 상향된 연봉과 상여금 조건으로 합류했다. 처음으로 지분 계약이 오가고 각종 서류가 오가고, 투자자들의 압박을 직접 받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 일을 이끌었다. 부담이 컸다. 그들은 모두 서로 친구 사이였고, 의사결정은 대표가 하지만 그 안의 지표는 내가 책임지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반대하고, 또 반대하는 일들이 그대로 의사결정이 될 때마다 투자자들이 따로 연락 와서 대표를 좀 설득해 달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엔젤 투자를 하는 이사들과 다 함께 합의한 마켓과 방향, 포지셔닝, 기간을 갑자기 모두 바꾸고 대표는 돌연 완전히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제안했다. 세부적인 이야기는 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부부가 성격이나 가치차이로 이혼하듯이, 그렇게 빠르게 결별했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스타트업도 사실은 예산이 모두 버닝 되고 있고, 대부분 매출이 아닌 투자를 위한 지표 만들기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여도, 1억, 10억, 15억은 굉장히 작은 돈일 수 있다. 금방 쓴다. 인건비만 써도 금방 나가고, 매출이 커진다고 해서 영업이익이 똑같이 개선되는 것도 아니다. 사업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당시, 분명히 희망적인 지표가 보였다. 계획대로만 남은 2-3달을 더 검증만 했어도 충분히 디벨롭해서 정식 런칭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결국 사업이라는 게 단순히 비즈니스모델 좋고 인프라 좋아서 되는 게 아니라, 멘탈 싸움이고 함께하는 동료들과의 커뮤니케이션, 협업, 의지, 공유, 마일스톤. 이 모든 것들에서 성패가 비롯되는 것 같다고. 돌이키며 정리한다.
5. 롯데스러운 문화와 스타트업스러운 부족함, 그 속에서 피어난 성과
#모 브랜드실 파트장이 됐던 그때
이곳은 나랑 가장 안 어울리는 조직이었다. 이곳은 아쉽지만 전형적인 대기업 구조를 대기업 아닌 인프라와 비즈니스 볼륨 안에서 품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인물이 많았고 일을 해봤자 받는 돈은 동결이라는 패착 경험 속에서 안주하는 동료들이 많은 곳이었다. 헛소문과 정치는 매우 심했고, 본부장 선까지 언급될 정도로 하극상이 빈번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은 업계 최초라는 타이틀과 20-30%대의 2위 마켓셰어를 자랑하고, 아무나 진입할 수 없는 인프라 시장에 속해 있었으며 핫하고 유망한 카테고리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었다. 당시 모든 마케팅 예산을 총괄하는 게 브랜드실이었고, 나는 브랜드 실장이 부재한 상황에서 온라인 마케팅의 예산 과반 이상을 책임지는 역할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파트를 빌딩 하고, 업무를 확대하고, ROAS는 500% P 이상을 개선하며 당시 직전 3년 치(해당 기록이 시작된 시점부터) 내 최대 성과를 만들었으며, 신규회원 유치 단가는 45%를 절감했고, 신규 회원 유치를 위한 정책과 쿠폰 스킴, 프로모션 등을 총괄하는 기회, CRM 일부와 업계 최초 라이브커머스 도입, 그로스 툴을 활용한 인사이트 공유와 내부 교육 진행 등 많은 경험을 스스로 만들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새로 부임한 브랜드 실장과의 마찰과 잦은 조직개편, 모회사의 정책 변동 등의 이슈에 부딪혔고 그 상황 속에서도 많은 부분(보고 능력, 숫자를 활용하는 제안력, 20-30억대의 예산 운용과 20여 개 매체 플레이, 수많은 브랜딩 내용과 롯데 계열사들과의 제휴 콜라보 등)을 추가로 익힐 수 있었다.
또 그와 동시에, 이곳은 내가 계획한 독립을 한 2년 정도 앞당기게 해 준 곳이기도 하다.
6. 1년 동안 미룬 런칭을 1달 안에 싹 성과화한 스타트업
7. 일이 몰려 들어오며 자연스레 독립.. 그 90%가 커머스, 1-5번 사이에도 언급 안 한 커머스들
8. 개인사업자, 일반과세사업자, 법인사업자로 오기까지..
9. 2억대의 IMC 프로젝트 계약 (말 그대로 브랜딩 전략부터 컨텐츠, SNS, 광고, 제휴, 유튜브, 바이럴 등 통합 성과화)
10. 동시에 많은 커머스들의 부스팅, 증액, 플랫폼조직 투자 유치 파트너, 그로스 플젝들...
11. 덕분에 지금 맨투맨으로 대표님들에게 코칭 프로그램 서비스 중..
12. 이제 나는 매월 천 이상은 이익으로 확보한다. 법인 치고는 매우 작지만, 안분지족하고 있다. 그리고 대행 포지션을 축소하고 컨설팅을 늘려보고 있다.
나는 어쩌다 해그로시 법인을 운영하게 되고, 또 많은 커머스 브랜드들, 일부 플랫폼/서비스 브랜드들의 마케팅 챌린지를 즐기고 있다. 그 중에는 Go To Market 단계에서 한정된 예산과 인프라를 특정 기간 안에 기획부터 숫자로 찍는 일들이 많았다.
요즘 일론 머스크라는 사람을 보면, 이거 좀 뜬금 없는데 스티브 잡스 이후로 나온 또 하나의 괴짜이자 천재 같다. 나는 스타트업에서 많은 대표들, 코파운더들, 성과에 목말라 있는 조직들을 시작으로 지금의 해그로시까지 왔기 때문인지, 내가 왜 스트레스 받고 방금 기억한 걸 돌아서면 까먹고, 단 하나에만 집중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나는 그런 천재들만큼 절대 뛰어날 수 없지만, 그만큼 집착하고 매달 맞춰야 하는 숫자를 인생 시트라는 구글 시트를 맨날 열어보며 맞춰야 하고, 그와 동시에 내가 내 이름 걸고 하는 브랜드 협업의 성과와 그 경험에도 책임을 져야 하니까.
동시에, 나이를 먹으면서 참 둥글둥글해지고 있다. 허허허 웃으며 넘기는 것들이 많고, 이젠 남들과 싸우기 싫고,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좋은 관계와 사람들에게만 신경쓰려고 하고 있다. 막 심각하게 힘을 준다고 해서 그런만큼 일이 다 풀리지는 않는다. 벌 때가 있으면 못 벌 때도 있는거고. 또 그와는 상관없이 페이스, 기세가 중요하고.
언젠가 왜, 성장을 해야 할까? 싶었는데. 내 욕망과 욕구를 살피고 나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어떤 부분에 스탯이 올라가고 있는 게 보인다.
어쩌면 한 13-14년 전 대학시절에, 창업 동아리 활동하고 중소기업청 소속으로 지원금 받으며 사업계획서 쓰고, 대학가 근처에 가판대 깔아놓고 점포 사장님들 제휴로 맺으며 물건, 서비스 홍보하고... 나중에는 홍대 앞에 앉아서 뭐 또 팔고 있고, 영화 동아리 운영하고 영화 찍고, 영화제 개최하며 컨텐츠 만들고, 블로그 키워보고, 경진대회 나가서 수상하고... 하는 그때의 아이덴티티가 지금까지 쭈욱 이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평범한 마케팅과 마케터들 사이에서 나는 그렇게 생존하고 있다.
독립 후, 정식으로 합류 제안을 받은지 3번째다. 주변의 선배들이 회사 돌아가고 싶지 않냐, 사업 힘들지 않냐고 찔러볼 때마다 내가 한 대답은 같았다. 내가 야간 대리운전을 뛰더라도 절대 회사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지금의 시간과 노력 대비 아웃풋, 내가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많은 범위와 잠재성들이 주는 레버(Lever)를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의 합류 제안에 진심으로 고민하고 응하는 건 결코 짧지 않고, 결코 순탄하지 않으며, 결단코 멋있지 않을 수많은 짜치는 일들을 또 하면서도 브랜드 초석과 자산을 만들어가는 재미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근데 재미만 따질 수가 없어서 조금 신중하다. 그게 서로에게 좋다.
나는 이제 밸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