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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이 Sep 04. 2023

비 오는 날 수채화

일하며


 라디오를 하던 몇 년 전에는 비 오는 날이 정말 반갑지 않았다. 날이 좋거나 흐리거나 상관없이 원래도 오프닝 시그널이 시작되면 손가락 끝으로 짜르르한 기운이 퍼지면서 각성되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는데, 비 오는 날에는 앉아있는 의자가 방 뜨는 것처럼 떨렸다.


 비 오는 날엔 교통사고가 평소보다 많아진다. 시야가 흐리고 길이 미끄러우니까 예기치 못한 실수들이 길 위에 자꾸 생긴다. 게다가 나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약속한 9시 정각에 나타나는 목소리였으니, 비 때문에 평소보다 이동시간이 길어져 난감한 사람들이 길 위에서 내 프로그램을 맞닥뜨렸으면 기분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비가 더해주는 나의 긴장감의 원인은 부담감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날이 어두컴컴하 습해서 기분이 처지는 것, 빗길 교통사고가 우려되는 것도 있었지만 듣는 사람들이 비 때문에 하루를 시작하자마자 지치고 언짢은 상태에서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어떤 분위기로 프로그램을 이끌어야 할까.


 하지만 그때의 내가 담감보다 더 중요한 문제점이 긴장의 주된 원인이라 생각한 건 속보였다. 흐름을 끊고 원고에 없는 속보를 해야 하는 게 두려웠다. 연습은 수없이 했지만 실전에서 연습과 똑같은 상황이 생길 리 없고, 지금 속보를 하는 나는 이 상황에 대한 멘트를 연습해 볼 수 없다. 노래를 듣다가 끊고, 출연자와 인터뷰하다가 끊고, 심지어 끝인사를 하다가도 끊고 속보를 해야 했다. CCTV속에는 난처한 두어 대의 차가 꿈쩍 않고 서있고, 다른 차들은 사고지점을 피해 느릿느릿 차로를 바꿔 달아난다. 영문을 모르는 뒤차들은 끝도 없이 더 뒤로, 점점 더 뒤로 늘어선다. 나는 리허설 없이 그들 대신, 목소리로 그들보다 먼저 사고지점으로 가야 한다. 이걸 잘 못할까 봐, 정확하지 못하거나 이해하기 어렵게, 더디게 전달할까 봐. 그래서 혹여 내 부족함이 드러날까 봐 걱정했다.


 까마득한 선배였던 프로그램 담당 PD는 내 속보멘트를 크게 나무란 적이 없다. 내가 더할 나위 없이 잘했다는 뜻이 아니다. 운전경력이 없는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설명해 주며 다음 빗길사고 때는 이런 내용을 넣어봐라 알려주기도 했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멘트를 왜 안 했냐, 하지는 않았다.


 해야 된다고, 그래야 좋은 진행자가 될 수 있다고 짚어주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비 오는 날은 조금 더 오래, 더 깊게 그들의 마음을 생각하라고. 비 오는데 사고가 나면 평소보다 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럽겠냐고, 비 와서 안 그래도 운전이 평소보다 신경 쓰이는데 앞에 사고가 나서 평소보다 늦어지면 기분이 어떻겠냐고. 늘 생각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려고 해 보라고. 목소리로, 말투로, 문장으로. 그게 속보를 아주 디테일하게 전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질문형식의 멘트를 많이 해보곤 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오늘 뭐 입으셨어요? 디 지금 많이 막히죠? 오늘 같은 날은 좀 늦어도 서로 다 양해해주지 않을까요? 오늘 저녁약속 있으세요? 우산은요?


 어떤 분위기로 프로그램을 이끌어야 하는지 그건 내가 정할 필요가 없었다. 정한다고 그대로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듣는 사람의 기분을 헤아려보려고, 이해하려고 하는 과정을 그대로 방송했으면 됐던 것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 방송은 만들어놓고 보여주는 완성품이 아니라 2시간 동안의 '과정'이었으니까. 진행자로서의 부족함은 속보를 하다 실수했을 때만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래서 비가 오면 더 오래 생각했던 것 같다. 오늘 나와 만나는 그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어떤 말을 듣고 싶을까, 어떤 노래를 들어야 이런 노래를 비와 함께 들어서 좋다고 생각할까.



제목은 권인하, 김현식, 강인원의 노래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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