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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초이 Aug 21. 2019

초록색 물감

 미술시간이었다.


"밑그림을 다 그린 친구들은 색칠해도 돼요"


 엄마가 새로 사다준 물감을 꺼냈다. 길쭉한 아이보리색 종이 상자를 열어보니 얇은 종이가 한장 깔려있고, 그 아래에 은색의 물감들이 누워있었다. 짝꿍이 가져온 말랑말랑한 흰색 플라스틱 물감보다 훨씬 좋은거다.


"우리 엄마가 사다 줬어."


 나는 통통하고 반짝이는 내 물감과, 무거운 검정색 빠레뜨, 다른 색이 하나도 묻어있지 않은 물통까지 전부 자랑하고 싶었다.

 

 어떤 색을 칠할까. 나무를 많이 그렸으니까 초록색을 골랐다.


 꽉 닫혀있는 뚜껑을 겨우 열고, 빠레뜨의 작은 칸을 향해 물감의 몸통을 살짝 눌렀다. 물감은 안나오고 비눗방울 모양의 거품과 물만 삐죽 흘러나왔다. 나는 다시 물감을, 꽉 하고 눌렀다.


 꽈구작. 하고 찌그러졌다.


  "야! 너어! 나한테 다 묻었잖아!"


 갑자기 예슬이가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게 내 물감이었는지도 몰랐고, 내 물감이 튀었는지도 몰랐고, 예슬이가 왜 우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데


 눈 앞에 선생님이 나타나 내 손에서 물감을 빼았더니, 촥 하고, 왼쪽 얼굴이 뜨거웠고, 그리고 나서 아팠다.


 며칠 뒤에 엄마가 예슬이에게 가져다 주라며 종이가방을 주었다.


 "구겨지지 않게 잘 들고가. 가자마자 예슬이한테 주면 돼, 응?"


 그 안에서는 세탁소 냄새가 났다.




 갓난쟁이를 먹이고, 재우고, 눈 좀 붙이려던 참에 딸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어쩐지 긴장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 주섬 꺼냈다.


 "혜윤아 이게 뭐야? 너 물감 흘렸어?"


 펼쳐 보니 '문예슬'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초록색 물감이 이리저리 튀어 있었다.


"실수로 그랬어? 물감을 짜다가 튀겼어?"


 몰라. 딸은 시선을 피하며 식탁 의자에 앉아있었다. 모르긴 왜 몰라. 가방을 열어보니 새로 사주었던 아이보리색 물감 통에 딸의 지문이, 초록색 지문이 여기 저기 묻어 있었다.


"선생님한테 혼났어? 그래서 예슬이 옷 가져왔어?"


 고개를 푹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한번씩 짜보고 꽉 누르면 안된다고 말해줄 걸, 어린이용 물감을 사줄 걸, 아니 그냥 파레뜨에 다 짜서 보낼 걸. 즐거웠어야 할 미술 시간을 엄마의 무관심으로 전부 망쳐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콱, 칼에 찔린 듯이 아팠다.


 동시에, 아이가 실수를 좀 했기로 서니 얼마나 혼냈길래 저렇게 기가 죽어 온 건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쁜년. 김신자 니가 뭔데 내 딸한테.


 동시에, 촌지를 안줘서 내 딸을 그렇게 잡은걸까. 불쌍한 내 딸, 안된다.

 



 은행에 다니는 남편이 빳빳한 새 돈 뭉치를 가져왔다. 나는 봉투 중 가장 희고 깨끗한 것을 골라 돈을 넣었다.


 "혜윤이가 오랫동안 외동이어서 좀 철이 없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마녀같은 년.   

 

 "아닙니다. 너무 잘 하고 있어요."


 "선생님께서 너무 수고가 많으셔서, 제가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거예요."


 "아이고 뭘요."



 

"엄마! 나 상 받았어!"


 2학기가 되자 딸은 한 달에 한 번씩 상장을 받아왔다.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아 기뻤다. 좀 더 일찍 해주지 못해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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