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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초이 Aug 22. 2019

차가운 복숭아 통조림이 그리운 밤

엄마의 해열제

 영하의 날씨에 오리털 파카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9cm 하이힐도 장착 완료. 며칠 전 눈이 오길래 운동화를 신었더니 '혜윤씨. 이제 삼 년 차라고 편한가 보네'란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선물 받은 가죽 장갑도 꼈다. 버스정보를 봐야 하니 엄지는 빼놓는다.


 기분이 좋아야 할 금요일인데 아침부터 닦달뿐이다. 그놈의 중기 계획은 왜 매 분기 짜는 건지. 나는 기계다, 나는 기계다 하면서 자료를 만든다. 한참을 뭐라고 하더니, 문장 하나 바꿨다고 이제 맘에 든단다.


 아직 네시다. 관자놀이부터 찡하더니 이내 머리 전체가 쿵쾅거렸다. 점심을 안 먹어서 그런가. 짜증 나게 지끈거린다. '집에가고싶어 병'임이 분명했다.


 거들떠보지도 않는 팀장을 뒤로하고 나 먼저 퇴근이다. 어떻게 할까. 큰길에서 내리는 버스가 오면 운동을 가고, 아니면 집으로 간다. 코너를 돌아 나타난 9.3.0.0. 오늘은 집이다.


  집이 비어있었다. '다들 있을 시간인데'하며 브라 끈을 풀고, 스타킹을 둘둘 벗어던졌다. 족쇄에서 벗어나자 두통이 줄어들었다가, 튕겨 오르는 듯 심해졌다. 대충 씻고 드러누워서,


-엄마 어디? 나 머리아퍼서 일찍 잘게


 톡을 날려놓고 눈을 감았다. 눈동자와 눈꺼풀 사이가 뜨겁게, 쿵 쿵 하고 울린다.




-딸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엄마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린다.


-저녁은 먹고 왔어? 엄마 한살림 갔다 왔는데. 죽 끓여줘? 청양고추 넣고 콩나물국 끓일까?


-아니 엄마, 나 지금 너무 덥고 답답해서 그냥 잘래.


 엄마는 차가운 손가락으로 내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엄지 손가락으로 눈썹을 빗어주고, 손바닥을 내 목에 가져다 댄다.




 한참을 잔 것 같다. 엄마가 '딸 일어나 봐'하며 내 침대 위에 앉았다. 이불이 내 가슴을 누르자 하, 하고 뜨거운 숨이 내뱉어졌다.


 -엄마가 복숭아 통조림 사 왔어. 시원해. 먹어봐.


 엄마는 통조림 황도가 담긴 유리그릇을 내밀었다.  투명하고 향긋한 시럽 위에 노란 복숭아가 둥그렇게 떠있다. 몸을 일으켜 마른 입술 사이로 통조림 국물을 흘려 넘겼다.


 시원한 액체가 뜨거운 혀를 적셔왔다. 목구멍 속을 훑고 내려가 몸속 깊은 곳의 뜨거운 불을 식혀주기 시작했다. 사타구니까지 저릿했다.


 엄마는 복숭아 과육을 티스푼으로 작게 잘라 입에 넣어주었다. 츄릅, 무엇과도 비교불가한 이 식감.


-조금 남았어. 이거까지 쪽 빨아먹어.


 나는 비를 만나 피어나는 꽃처럼, 마음속에 뭔가가 터져버리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한 입, 두 입, 아기새처럼 엄마가 먹여주는 복숭아 통조림을 먹고는 이내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어릴 적 엄마는 쓴 가루약을 달콤한 부루펜에 개어 먹였다.

-깨끗하게 쪽 하고 빨아먹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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