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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초이 Aug 25. 2019

구몬에 중독되다

 우윳빛깔 너의 모습

 하루에 몇 장씩 풀어야 하는 숙제가 너무 싫었다.

 -그럼 이제 구몬 그만할래?

 -아니야 이제 숙제 잘할게, 계속할래.

 라며 억지를 부렸던 이유는 단 하나, 구몬에서 나는 냄새가 좋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빨간 색연필로 채점을 하는 동안, 나는 새로 꺼내 주신 구몬을 문질러본다. 구몬 냄새가 난다. 얇지만 단단하고, 그렇다고 뻣뻣하지도 않으며, 미끈거리지도 않은 그 느낌이 좋았다. 손끝으로 문지르면 지문 사이로 고운 가루가 묻어나는 듯한 그 느낌, 지문이 사라질 것 같은 그 부드러움에 닭살이 돋았다. 샤프로 쓱 부드럽게 써지고, 지우개로 지우면 흔적 없이 깨끗하게 지워지는, 자연 교과서 말고 수학 익힘책 종이랑 비슷한데 좀 더 새 거 같은 종이.


 -혜윤아 왜 5쪽이랑 12쪽이 없지?

 -어 진짜요?


 왜기는. 너무 지겨워서 뜯었으니까, 뜯어서 책상 뒤로 넘겨 버렸으니까 없는 거다. 구몬 선생님은 이런 일이 자주 있다는 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뜯는 얘기를 잠깐 하자면 이 구몬 학습지는 종이의 느낌만큼이나 뜯는 느낌도 예술이다. 풀로 붙인 듯한 마감인데, 약간만 힘을 주어 당기면 '보옥', 하고 종이가 뜯어진다. 반대편 페이지를 꽉 누르고 뜯는 게 핵심이다. 종이의 끝면을 섬세하게 붙여놓아서 그런지 두 쪽 정도는 뜯어도 별 티가 안 난다. 힘 조절을 잘못해서 끝이 찢어지거나 구겨지면 포기한다. 그 페이지도 다 풀어야 한다.


 구몬 선생님이 가져오는 새 구몬은 촉감도 좋고, 냄새도 좋아서 확실히 문제도 더 잘 풀린다. 글씨도 잘 쓰고 싶어 진다. 숫자 2의 아랫면을 물~결 모양으로 꾸며 써본다.


 그런데 선생님이 가시고 숙제로 남는 순간부터는 뭔가가 달라진다는 거다. 어쩐지 냄새도 신문지에서 나는 똥냄새랑 비슷한 것 같고, 종이도 더 얇아진 것 같고, 더 이상 우윳빛깔도 아니다. 글씨도 날림으로 써버린다. 처음엔 가볍고 팔랑거리던 몇 장의 종이가,


 - 구몬 다 했어?

 - 선생님이 두 권이나 숙제로 줬어!


 어느새 두 권짜리 책이 되었다.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는 건 순간이다.




 한참을 잊고 살았다. 개정 교과서는 전부 지우개가 안 드는 매끈한 코팅지로 바뀌었다. 개념원리는 너무 얇고, 숨마쿰라우데는 너무 하얗고. 그러다 대학교 1학년 때 구몬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책 한 권을 만나게 된다.


 - 보문고, 경제수학, 정필권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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