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편] 프랑수아의 다른 여자에 대해 알게 되다
그렇게 그날 밤새도록 프랑수아와 역대급 사랑을 나누었고,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프랑수아와의 첫만남부터 읽고 싶다면 지난 글을 확인해주세요.
지난 밤은 정말 강렬하고 특별했어. 네가 그동안 내게 얼마나 스윗하고 좋은 사람인지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어. 저녁에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중요했던 것 같아. 그동안 많이 사랑해줘서 고마워.
프랑수아와 끝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 심증적으로 그가 다른 연인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긴 했다만 우연히 베트남 여자친구들과의 걸즈나잇아웃에서 실제 그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걸즈나잇아웃을 하면 항상 등장하는 연애토크를 했다. 요즘 잘 되는 사람은 있는지, 어떤 남자 취향을 좋아하는지 등등. 그러다가 친구들이 내 상황도 물어보길래 어떤 프랑스 남자랑 잘 되다가 최근에 막 끝난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더니 한 친구가 프랑스 남자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호치민 내의 외국인 커뮤니티는 생각보다 작다. 외국인들이 가는 펍이나 클럽이 정해져 있어서인지 한 다리 건너면 서로 다 아는 사이일 정도다. 프랑수아라고 말했더니 친구가 갑자기 기겁을 한다. "세상에... 이 프랑수아가 그 프랑수아인가?"
그러더니 페이스북에서 그의 프로필을 찾아 내게 보여준다. 똑같은 프랑수아가 맞다고 하자 친구는 그녀의 일본친구 마나미가 최근에 프랑수아와 사귀게 되었다고 말했다. 궁금함을 견디지 못하고 마나미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사진 속 마나미는 친구로 만났더라면 좋은 사이가 되었을만큼 호쾌하고 털털해보이는 이미지였다. 뭉뚝하고 더 까무잡잡한 박세리 선수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상이 아니었어서 그럴까 묘하게 위로가 됐다. 프랑수아는 익히 내게 자기가 어두운 피부의 여인에게 더 끌린다고 말했었다. 자기의 개성적인 취향에 맞는 여자를 찾았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조금 충격적이고 가슴 아팠던 것은 그가 그녀와 그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관계보다 한 단계 앞서 그녀와 "사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그간 연애하며 받은 상처를 다 토로하며 자기는 더이상 누군가와 사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열렬히 주장하던 그가... 나와의 만남을 정리함과 동시에 새로운 누군가와 사귀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로 유추해보니 그는 그녀와 만나기 시작한 첫 주에 나와 그날밤을 보낸 것이었다. 일주일 정도 겹치는 시간이 있었다. 왜 그가 그날 오후에는 뽀뽀 하나 없이 친구처럼 대하려고 했던 것인지, 왜 그의 행동이 내내 이상했는지, 왜 내게 그런 작별인사를 보낸 것인지 다 이해되기 시작했다.
왜 나는 시츄에이션에 그치고, 사귈만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걸까
충격에 빠진 나의 모습을 보며 베트남 여자친구들이 위로해주기 시작했다. 내가 만난 친구들이 로컬 베트남 여자들을 대변하는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다 어느 정도 영어를 수준급 이상으로 구사할 줄 알고 외국 남자와도 연애해본 경험이 있는 속히 말하는 "신여성"측에 속했다. 나는 시츄에이션십이 너무 어렵다며 아직까지도 신체적 교류와 마음의 나눔을 분리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 진정 MZ세대라고 볼 수 있는 나보다 7살 어린 친구까지 모두 나를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귀여워한다. 나보고 너무 스윗하고 순수해서 그렇다며..
순수...!! 나는 이곳에서 의외로 순수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프랑수아도 나보고 퓨어하다고 하질 않았는가. 참 낯선 상황이다..!! 국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외국물 먹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그와 더불어 내가 캐주얼한 만남을 쉽게 가질 것이라는 편견도 분명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뭐 8년 정도 유럽권에서 거주하기는 했으니 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 그렇다고 만남이 더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살면서 한국과 일본 사회가 베트남 사회에 비해 여러모로 연애관과 이성상에 대해 더 보수적이라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어리기도 어리지만 많이 놀(?) 것 같지 않은 여자친구들이 마치 언니가 된듯한 말투로 내게 몇 가지 조언을 해준다.
시츄에이션십을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라! 그저 즐겨라! 마음을 주는 순간 지는 것이다. 마음을 줘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임감과 죄책감을 버려야 한다.
남자도 다 성인이고 그들도 자기의 결정에 자기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좋아하는 남자가 내게 구애활동을 할 때 내가 그 마음에 보답할 수 없다고 해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들이 좋아서 하는 행동이니. 그들도 충분히 자기의 계산 하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우리는 퀸이다. 퀸처럼 대우를 받아야 한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데에는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나는 데이트를 할 때 절대 돈을 내지 않는다. "Do you want me to split the bill? (나눠서 냈으면 좋겠어?)" 하고 물은 뒤 남자가 예스라고 대답하면 나눠서 내고, 그 대신 두 번째 데이트는 없는 것이다. 나는 데이트 중에 절대 문도 스스로 열지 않는다. 남자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린다. 그들이 우리를 만날 때 에스코트할 자세가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남자 또한 동등하게 잘해주는 여자보다 쟁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여자에게 더 끌리기 마련이다.
혹하는 얘기들이 몇 가지 있기는 했지만 동의하지 못하고 자존심 상하는 얘기들도 더럿 있었다. 스스로를 높이 사는 태도는 분명 나 또한 도입시켜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강인한 여성은 에스코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한다. 받는 것에는 대가가 있기 마련이라고 본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기브앤테이크에 대해서 기브를 해야 할 의무를 느끼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어쩌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편한 사람일지도 모르겠구나.
어쨌건 젊은 베트남 여자들의 연애관에 대해서 듣는 것은 흥미로웠다. 다 듣고나니 어쩌면 내 썸이 짧은 이유가 내가 내 마음에 너무 솔직하고 모든 사람과의 만남에 진심이어서, 또 책임감이 강하고 죄책감을 쉽게 느끼다보니 흐지부지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결단을 내리는 성향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느 정도는 친구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강인하고 여유롭다고 떵떵거리며 불필요한 쓰레기 조각까지도 다 품고 소중히 하지 않았는가 싶었다.
호치민에서의 외국인 커뮤니티가 엄청나게 작다는 것을 몸소 느낀 이후로 나는 매직 트라이앵글의 종말을 외친다. 사실 세 명을 정확하게 동시에 만난 것이 아니었으므로 진작에 트라이앵글은 해체됐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당분간은 연애를 하기 위해 나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한 달 정도는 아무런 썸도 타지 않고 조용히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트라이앵글의 첫 꼭짓점인 트여르크가 또 연락이 와서 그를 만났을 때에도 그에게 더는 데이팅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직 트라이앵글 밖 언저리에서 계속 기웃기웃거리며 내 삶에 자꾸 침투하는 베트남 오빠가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