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편] 매직 트라이앵글의 해체
프랑수아를 끝으로 매직 트라이앵글은 해체됐다.
프랑수아와의 첫만남이 궁금하다면? 지난 글을 확인해주세요.
물론 사귀기로 한 것도 아니고 서로를 연인이라고 직접적으로 소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 무리와 함께 하는 주말 모임에 나를 여러 번 초대해줬고, 그의 친구들 앞에서도 애정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의 남자 사람친구들과 대화가 길어지면 나에 대한 소유욕을 눈에 띄게 드러낼 정도였다. 일전에 트여르크나 헤먼트와 시간을 보낼 땐 어째서인지 떳떳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해가 지고 나서 둘만의 공간에서만 만나는 것이 내심 속상했었다. 마치 음지에서 해서는 안 되는 밀회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프랑수아는 그들과 달리 낮에도 밖에서 느긋하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고, 친구들에게 나를 보여주고 소개해주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당당한 연인이 된 느낌이 들었다.
나와의 순간들을 기록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 같았다. 이게 시츄에이션십이고 잠깐 만나고 말 사이라면 상식적으로 굳이 증거물과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텐데. 그는 나와 정글 속 벙갈로우 여행을 가기 직전 오토바이 탑승을 위해 온몸을 썬글라스, 모자와 목도리로 둘둘 말아 무장했을 때도, 친구들 무리와 같이 춤을 추러 가 땀 범벅이 돼 꼬질꼬질한 상태였을때도, 세계 여성의 날에 꽃을 들고 와 같이 해산물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을 때도, 셀카를 찍자고 했었다. 다른 변태적인 뜻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사진들이었다. 순수하게 우리의 추억을 기록하기 위한 사진이었다. 나이도 어느 정도 있고 연애 경험도 많이 해본 사람인데 아직 관계 정립도 되지 않은 나와 사진을 남기고 싶어하는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과 같이 그의 친구들 무리와 함께 서양인들이 호치민에서 가장 자주 가는 라운지 바 중 하나인 Observatory 에 갔다. 루프탑 공간과 암흑의 방 공간이 따로 있는데 암흑의 방에서는 베트남에서 흔한 거대한 '질소 풍선'을 여기저기서 한 손에 들고 비트에 맞춰 몸을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The Observatory
https://maps.app.goo.gl/YbsNsiovL95AeHPf8?g_st=ic
질소 풍선은 엄밀히 말하면 불법은 아니다. Laughing Balloon 이라고 이름에 걸맞게 정신과 근육을 이완시키고 느긋해지게 하는 효과가 있는 듯 하다. 아는 지인은 '느린 사정'과 같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환각 증세가 있는 것은 아니며 느긋해지는 효과도 질소를 들이마실 때나 순간적으로 있는 일이라 풍선을 다 흡입하고 나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노이 부근 뮤직 페스티벌에서 발룬을 한 무리 중에 절도하다 사망한 사례가 있어 전 세계에서 베트남이 최초로 불법화를 실행하겠다는 뉴스도 있었다. 추측컨대 절도한 사례는 발룬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보통 발룬을 하는 무리는 그 이상의 것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남아공 출신 이민자들은 단순 대마를 넘어 음료에 타먹는 약이라든가 더욱 센 슈룸/버섯을 흡입하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프랑수아와 프랑수아의 친구들이 이에 해당됐다.
참고로 나는 이것저것 도전하는 데에 겁이 없는 편이지만 발룬을 하지 않는다. 발룬을 하면 목소리가 마치 헬륨 가스를 먹은 것처럼 변한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기는 한다. 하지만 며칠은 가래로 고생할 수 있다. 나는 노래를 하는 사람으로서 목이 많이 예민해서 담배나 유사 행위를 하지 않는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발룬이 기억 상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기사를 어디서 읽어서인데, 커리어도 연애도 다 머리로 득보고 사는 사람인지라 조금이라도 머리가 나빠진다고 생각하면 거부감이 든다. 무엇보다 어딜가서도 흥과 광기로는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에 다른 부스트 효과 없이도 아주 잘 놀 수 있다. 보통 친구들이 권할 때는 노래를 핑계로 거절한다.
그날도 암흑의 방에서 풍선을 들고 춤추는 사람들 속 프랑수아와 내가 있었다. 프랑수아의 친구들도 있었다.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데 프랑수아가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며 잠시 나가쟨다. 사실 프랑수아는 약쟁이다. 몇 대를 피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대마 담배를 달고 다닌다. 심지어 허벅지에는 대마 타투도 있을 정도. 프랑수아는 대마를 피어야만 정신이 느슨해지면서 즉흥과 감성을 즐기는 것 같다. 그에게 있어서 대마는 로맨틱한 제스쳐를 취하기 전에도 필수 요소이다. 이미 어느 정도 몽롱하게 취한 그는 내 손을 잡고 암흑의 방에서 나와 루프탑 구석의 호치민 시내 야경을 볼 수 있는 코너로 나를 데리고 가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자리에 앉자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너 지금 너무 예쁘다. 조명이랑 분위기랑 지금 너무 예뻐" 라고 말한다. 도무지 작업멘트라고 볼 수 없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은 표정과 눈빛이었다. 이어서 그는 나의 옆 머리카락을 살짝 빗어 넘기며 말한다. "신기해. 나는 사실 보통 어두운 피부의 이성에게 끌리는 편인데.. 너는 정말 하얗고 퓨어해. 이렇게 하얗고 퓨어한 사람한테 끌려본 적은 없었는데.." 살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자 그는 계속 주절주절 자기 마음을 꺼내었다.
"나는 지금 좀 사실 두려워.. 이렇게 너와 내 내면을 공유하는게. 우리 관계가 어떻게 발전될지 모르겠어.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 나는 그에게 이 말을 듣고 나서 좀 놀랬다. 연인의 관계에 있어 항상 가장 중요시한 것, 솔직한 내면의 대화를 그는 하고 싶어했다. 보통 시츄에이션십에 취한 사람들은 이 대화를 가장 기피시한다. 최대한 이 대화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피하기 일수인데. 그는 나와 함께 이 부분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했다. 이때 나는 바로 시츄에이션십에서 벗어나 한 단계 더 진전될 가능성을 느꼈다. 그는 다음주에 무이네 뮤직 페스티벌에 갈 예정인데 나와 함께 가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 무이네 뮤직 페스티벌 주말이 됐을 때 그는 나를 두고 친구들과 떠났다. 이유인즉슨 그도 친구 차를 얻어타는 입장이고, 승용차에 탈 수 있는 사람의 수가 한정적이라서. 나와 함께 가고 싶기는 했지만 나는 막판에 추가되는 인원이라 교통을 확보하지 않는 이상 같이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는 호치민에 남고, 그는 무이네로 떠났지만 그래도 나는 우리 관계가 확고해져가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환란의 파티일 수도 있는 뮤직 페스티벌에 가서도 프랑수아는 계속 내게 사진을 보내줬었다. 무이네에서 호치민으로 돌아오는 날에도 바로 나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내가 일과 관련된 선약이 있는 관계로 그를 바로 보지 못했다.
일주일이 또 지나서야 그를 볼 수 있었는데 그를 마주하자마자 뭔가 달라진 그의 태도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세상 칠~(chill)한 척 하고 히피한 옷차림과 웃음을 띄고 있었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미국인의 거짓 친절함으로 나를 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단둘이서 점심을 먹은 후 그의 친구들 무리와 함께 풀파티를 즐기러 갔는데 그때까지 내내 그는 나에게 작은 키스도 한 번을 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묘한 기류에 급격히 피곤해졌고 풀파티가 끝난 후 잠시 집에 가 옷을 바꿔 입고 다시 만나자고 했다. 내가 집에 가겠다고 하자 프랑수아는 갑자기 삐졌다?? "니 맘대로 해!! 내 집에서 내 옷 중 네가 입을 수 있는 것 입으면 될텐데. 멀리 있는 너희집까지 갔다오겠다고? 그래 니맘대로 해." 엥???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속상해하길래 일단은 그를 달래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같이 가겠다고 했다.
친구들에게서 벗어나 단둘이서 그의 집에서 차근히 얘기를 나눴다. 그제서야 그는 부자연스러운 그의 태도와 묘한 기류를 설명할 만한 얘깃거리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나는 사귈만한 사람이 아니야. 네가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필요이상으로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면서 지난 연애의 실패 케이스를 잔뜩 늘어놓기 시작한다 ...... 갑자기? 무이네 뮤직페스티벌 가기 전만해도 나와 진지한 관계를 생각하는 것 같았던 그가?... 마음이 쿵 내려 앉았다.
그간 나는 그와의 관계가 이전의 관계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마음을 키우고 있었다.. 오늘 그를 만나 이런 얘기를 듣게 될 것은 상상도 못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 머릿 속에서 말을 정리하다가 차라리 이런 상황에서는 뼈아플만큼 솔직하지만 강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도 너와 미래를 꿈꾸기는 어려워. 나는 너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없어. 이런 애매한 시츄에이션십에서 사랑고백은 금기시 된 것도 알고 있어. 그런데 I don't f***ing care. This is love. What I'm feeling is love, and I love you. That's it. I don't expect anything from you in return. I just want to share my feelings." 그러자 그는 그간 자기를 애써 가리고 있던 투명 방패를 내려놓고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나에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그날 나눈 사랑은 역대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사랑 고백을 하니 내 마음 속 꾹꾹 구겨 눌러 놓았던 사랑이 봇물 같이 터지며 우리는 그날 몇 시간이고 열정적이게 서로 사랑을 표현했다. 방 안 가득 그가 피운 대마 연기가 자욱했고 그 연기에 나도 몽롱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날은 정말 마법의 동굴 속에 들어가 이 세계 사람들이 다 멸종되고 고요한 지구에서 우리만이 인류를 구하기 위해 사랑을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와 사랑을 나누며 느낀 모든 벅찬 순간에 그동안 참아왔던 "I love you"를 연신 내뱉었다. 그는 나의 사랑고백에 응하는 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가림막 하나 없이 투명하게 그의 영혼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의 촉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는 나보다 더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머릿 속 한켠에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다음 글은 프랑수아의 머릿 속에 있던 다른 여자와 제 주변 베트남 여자들의 연애관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기대해주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