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편] 마르코 두 번째 이야기
많이 늦어졌죠? 기껏 다 작성한 22편 초안이 날라가서 그동안 다시 쓸 마음이 없었어요.. 어렵게 다시 결심해서 이어 씁니다.
지난 편, 마르코와 한 침대에서 팔을 맞닿은 상태로 잠이 들고, 아침이 되어 눈을 뜨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너무 위태롭다.
팔을 맞닿아 자던 그가 정말 조금의 여유공간도 없이 주먹 하나면 닿을 거리에 뒤돌아 누워 있는데 하... 내 눈 앞에 그의 거대한 등이... 허리만 또 얄상해서 딱 팔을 두르고 싶게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아 백허그를 하고 그의 거대한 등에 나의 볼을 대어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 자제하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결국 "너...... 너무 안기기에 매혹적인 자세로 있어." 라고 말했더니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등 지고 돌아 누웠어도 자상하게 웃고 있을 그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는 동굴 같은 저음으로 하지만 따뜻한 말투로 "네가 원한다면 안아도 돼"라고 대답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살포시 안아버렸다. 그때만 해도 정말로! 그냥 동성친구끼리 팔짱 끼듯이 커들링 할 생각이었지 그 이상 야리꾸리하게 발전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나의 짧은 팔과 작은 손 위로 그의 긴 팔과 큰 손이 겹쳐졌고, 그가 깊은 숨을 쉬어가며 거대하고 노란 비단뱀 같이 피부표면을 스치기 시작했다. 비단뱀은 고개를 돌아 나를 향했고 나는 작은 사막쥐가 되어 몸이 온통 그에게 휘감겨 있었다. 벗어날 수 없게끔 감겨진 상태에서 그의 어루만짐에 따라 꿈틀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깊은 숨결은 나의 귓바퀴 뒤와 목 사이 어딘가에서 여러 차례 뱀의 혀처럼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였고, 그는 간사한 미소를 띄우며 낮은 베이스의 울림으로 '이거 바보 같은 아이디어인가? 우리 회사에서 봐야 하는 사이인데. 너랑 나는 연애관도 다르잖아. 골치 아파질텐데?'라며 속삭였다. 감겨진 사막쥐는 서서히 이성을 잃어간다. '음.. 괜찮을 것 같아. 네가 여기에 계속 있는 게 아니라 한 달 있는거니까.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면 내 마음이 크게 엮이지 않을 것 같아.' 비단뱀은 흐뭇해하며 더욱 강렬하게 사막쥐를 감싸고 'Are you convincing me? (너 지금 나 설득하려는거야?)' 라고 물었다.
악마의 계약에는 두 가지 조항이 있다.
Non-exclusive: 비독점적 관계는 일대일 관계를 약속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는 각자 서로가 아닌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하거나 육체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기분이 상하거나 신경을 쓰게 되면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Non-committed: 여기에 유사하지만 비헌신성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만나는 사람의 수와는 별개로 설령 일대일로 만남을 이어 나간다고 할지라도 서로의 감정과 시간 그리고 미래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관계를 의미한다. 한국식으로 얘기하자면 하루에 몇 번 연락을 하고, 집에 돌아갈 때 알려주고 뭐 그런 의무를 전혀 느낄 필요 없다는 것이다. 결혼이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 또한 암묵적으로 금기시 된다.
두 가지를 다시 간단히 요약하자면 비독점적 관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가능성을 열어둔 것에 초점, 비헌신적 관계는 특정한 책임이나 장기적인 계획이 없는 것에 초점을 둔다고 볼 수 있다. 지난 편에 말했던 Intimacy without commitment 를 추구하는 사람이 이 두 가지를 기반으로 한다. 차라리 두 가지만을 기반으로 했다면 서로간에 기대하는 것이 명확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상당히 육체적 관계에 집중하는 메마른 관계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Intimacy 라는 촉촉한 감성과 애정에 대한 요구를 추가적으로 들면서 관계성은 더욱 복잡하고 모호해진다. 그럼에도 필자는 감정이 깊어져 상처받을 일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간 만나온 사람들로 인해 무뎌진 것도 있지만 미래지향적 성향인만큼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하는, 미래를 함께 계획해나갈 수 없는 사람한테는 그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그와 악마의 계약을 맺고 아침 햇살을 맞으며 영혼을 떼어주었다.
비단뱀과 사막쥐는 사람의 형태로 돌아왔고, 아침인만큼 배가 고팠다. 아니 그런데 이탈리아 사람들이 음식에 예민한 줄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밥 먹기 전후, 아침 커피 마시기 전후 너무 극명하게 다른거 아니에요? 아침 커피가 필요하다고 계속 심술궂은 표정으로 궁시렁대던 마르코는 브런치 카페에서 카페라떼를 두 잔을 마시고 나서야 다시 그의 시그니처 스칼렛 요한슨 미소를 띄었다. 그러더니 카푸치노 잔에 남아있는 거품 속 모양을 가리키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이게 하트게, 엉덩이게?" 라며 드립도 친다. 단군의 후손은 대답했다 "그건 마늘이야."
그 이후로 필자는 마르코와 일주일에 1-2번씩 친근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둘다 하노이에 새로온 사람들이어서 낮 햇살이 쬐는 동안 같이 도시관광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게 단순 집에서만 애정을 주고 받는 지난 인연들과 다른 점 중 하나였다. 예컨대 우리는 주말 점심시간에 만나 하노이 박물관 데이트를 같이 했다. 박물관 데이트라니! 이전에 레오와도 미술관 데이트를 하려다 실패했다는 얘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레오편) 필자는 항상 연인과의 문화활동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데이팅 앱이나 맥주집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다른, 함께 지적 탐구를 할 수 있는 상대였다. 드디어 근본 있는 사람이랑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뭐 그렇지만 하노이 박물관이 정보 제공이 허술한 편이라 이것저것 유물이나 사진을 보면서도 도통 정보 습득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마르코와 필자는 우리만의 아무말 대잔치 추측게임을 해야 했다.
예를 들어 도자기를 보면서 여기 도자기 뚜껑에 성행위 조각상을 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 도자기는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하면 우리는 상상 속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만들어냈다. 그러면서도 완전 아무말 대잔치는 아니었던 게 어떤 사진이나 유물을 보다 보면 서로의 인생의 파편과 연결지어 설명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다. 전 세계 여러 곳을 살아온 그의 지식과 경험은 인상 깊었다. 때로는 박물관의 전시실 한 구석에서 다른 구석까지 떨어진 채로 각자 집중하며 사진과 유물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끈은 마치 고무줄 같이 팽팽하게 느껴졌다. 그도 나도 각자 팔짱을 낀 상태로 진지하게 전시품을 보았지만 자꾸만 스치는 팔뚝과 마주치는 눈빛은 강렬하고 짜릿했다.
그렇게 베트남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새로 배우지 못한 채, 반미나 먹으러 호안끼엠 호수 쪽으로 갔다. 우리는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반미25에서 반미를 포장해 호수가에 쭈그리고 앉아 먹기로 했다. 때마침 해가 저물고 있었고, 진한 주홍빛 석양에 반짝거리는 호수 물결이 얼굴을 익어가게 했다. 마르코는 눈이 부시는지 레이반 선글란스를 끼고도 찡긋거렸다. 그의 금빛 속눈썹이 빛났다. 반미를 먹고 있는 우리에게 교복 차림의 12살 정도 되어 보이는 작고 예쁜 베트남 소녀가 다가왔다. 뿔테 안경에 딱 봐도 아주 똘똘한 도토리 같이 생겼고, 영어도 정말 똑부러지게 했다. 학교 과제 중에 외국인과의 인터뷰가 있다며 우리가 이 곳에 왔고 어디에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물었다. 우리는 소녀를 몹시 기특하게 바라보며 우리가 일하고 있는 기관의 미션과 의의를 최대한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것을 마르코의 목소리로 듣는 것이 좋았다. 그날은 연인 같은 스킨십 하나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풍족하게 차오르는 정말 아름다운 날이었다. 오히려 서로를 만지지 않고도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랑이 샘솟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행복했던 박물관 데이트 이후로, 좀처럼 일대일 만남의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됐다. 마르코가 이전 오피스에 같이 일했었던 필리핀 아저씨가 긴급 직원으로 우리 오피스에 파견이 된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마르코가 12-14편에 나오는 베트남 포켓몬 연하남과 친해져 버렸다. 그 이후로 마르코는 주말이 되자, 필자, 필리핀 아저씨, 베트남 포켓몬 연하남과 다같이 맥주를 마시자고 권했다. 그래, 일대일 만남이 아닌 것은 조금 아쉽긴 했지만 악마의 계약에 의하면 필자가 마르코에게 헌신할 것을 기대하면 안 되기 때문에 쿨하게 필리핀 아저씨가 동행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포켓몬남의 경우는 달랐다. 이전에 감정을 가졌었던 사람인데.. 마르코와 같이 일이 아닌 사석에서 만나다니. 심지어 포켓몬 연하남은 자기가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까지 데리고 왔다. 본인이랑 똑같이 이상해씨 포켓몬 같이 생긴 여자아이(내 눈에는 아이였음)와 어깨동무를 한 채 잠시도 어깨동무를 풀지 않고 내내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쯤에서 잠시, 하노이 오피스로 재배치된 후 포켓몬남과의 관계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겠다. 분명 한 때는 그를 생각하며 마음이 저린 적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같은 팀에서 일을 하면서도 전혀 그가 신경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오피스에서 일하니 직급이나 연륜 차이가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해서 여기저기 웃는 얼굴로 몸으로 때우며 일하는 모습이며, 아저씨 직원들의 시중과 아줌마 직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굽신거리는 모습이 매력적이게 다가오지 않았다. 가끔 필자가 화장에 신경을 쓰거나 예쁜 옷을 입을 때 그의 눈빛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안녕'하고 인사만 나눌뿐 그 이상의 대화는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참 신기하지..! 지금도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런데 그뿐 그 이상의 이성관계 대상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는 우리가 같은 주차장을 이용하다보니 먼저 앞서 걸어가던 그를 뒤에서 몰래 지켜본 적이 있었다. 퇴근 후 신난 발걸음으로 농구 골 넣는 포즈를 몇 번 취하다가 길거리 한 가운데에 내팽겨쳐진 부러진 안전표지 삼각콘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조심히 접어 길 모퉁이에 놓는 모습을 보며 '음, 맞아. 저래서 내가 쟤를 좋아했었지. 분명 매력 있는 친구기는 해' 라고 생각을 했었다만 그가 탐나거나 그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한 때 애정을 나누던 사이였는데 뻔뻔하게 자기 여자친구를 내 앞에 데리고 와서 애정행각을 하는 것은 괘씸해도 너무 괘씸했다. 기분이 영 불쾌해 나만의 복수를 했다. 첫째는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며 그의 여자에게 친근하게 대해주어 그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었고, 둘째는 마르코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다보니 서로 엄청 친해졌다는 것만 살짝씩 보여줬다. 술을 더 마실수록 쉬운 일이었다. 마르코는 내가 그날 그에게 의도적으로 친근하고 다정하게 대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새벽 2시쯤 우리가 있었던 클럽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됐을 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와 다른 클럽에 가겠다고 말해놓고 내게 다가와 나의 집에 같이 가고 싶다고 말했다. 엥? 서로 기대를 하지 않기로 합의한 관계이다 보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필자가 지금 너무 늦지 않았냐며 놀라는 기색을 보이자 마르코도 필자의 이런 리액션을 예상하지 못했나보다. 토라져 버렸다. 나보고 왜 그러냐며 궁시렁궁시렁대더니 그냥 같이 시간 보내고 싶어서 그렇다며 궁시렁궁시렁. 지금 생각해보니 조금 귀엽네... 그래서 그날 토라진 마르코를 집으로 데려와 어르고 달래주었다.
내 소파에 널부러져 있는 그에게 다가가 쫀득하게 입을 맞춰주며,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왜 삐졌는데~"하고 달래줬다. 그는 퉁퉁거리는 말투로 우리가 Intimacy without commitment 관계에 합의했을 때 Intimacy (친근함) 의 정도가 5% 정도여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 뚱딴지 같은 놈. 정말 그 정도만의 친근함을 바란다면 그날 우리집에 와서 일대일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겠지. 그리고 내가 그걸 예상하지 못했다고 서운해하지도 않았겠지. 그냥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자기 방어적으로 구는 것 같이 보였다. 그래서 계속 사랑스러운 입맞춤을 해주며 "5%로 어디 되겠어? 나는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라 20퍼는 되어야 하는데?"라고 말하니 거구의 사나이가 소년 같이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서로 편히 껴안고 그의 귓가에 속삭이고 수염을 어루만져주며 사랑을 퍼부어주다가 우리는 동시에 잠이 들었다.
먼저 잠이 깬 필자는 마르코의 자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다시 몽글몽글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쩜 이렇게 아기 같고 예쁠까. 이렇게 큰 체격의 사나이인데 아기 같이 달콤한 숨냄새와 살냄새가 나다니.. 신기했다. 앵무새 분 냄새를 맡아본 적은 없지만 그런 냄새일 것 같은 느낌? 애완동물 꼬순내의 개념이지만 꼬수운 냄새는 아니고 젖향(?)으로밖에는 도통 표현이 안 되네. 아마도 옥시토신이 분비돼서 이 향을 좋게 느끼는거겠지. 그런 아기 같은 그를 또 꼭 껴안고 우리는 두 번째로 사랑을 나누었다. 서로를 천천히 어루만져 주면서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했다. 그는 내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 물었고, 그런 그에게 나도 되물으니 그는 똑똑하고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성숙하고 나이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단순 동물적이지만은 않은 차분하고도 예쁜 아침시간을 보냈고, 그가 샤워를 하러 갔을 때 그의 오른쪽 엉덩이에 있는 문신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한입 먹힌 크래커 문신이었다. 살면서 본 타투 중에서 가장 못생긴 문신이었다. 아니 사진, 영상을 업으로 담당한다는 사람이 예술성을 갖춰야 하는 사람이 저런 타투를 엉덩이 볼기짝에 한다고?.. 그런데도 그게 그만의 매력 같았고 귀여워 보였다. 어쩌면 필자는 이미 그에게 감정이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분이 최상이었던 필자. 좋아하는 카페가 있으니 같이 브런치를 먹으러 가자고 그에게 제안했다. 같이 나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기 전, 그에게 "Can I get a kiss?" 라고 물었다. 30분 전만해도 더한 행위도 같이 했으면서 이상하게 마르코는 이런 사소하고 귀여운 순간에 몹시 소년 같은 얼굴을 하며 부끄러워 했다. 마르코는 쭈뼛거리며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했고, 그런 그의 입술에 필자는 쪽!하고 뽀뽀를 했다. 각자 오토바이를 물고 브런치 카페를 가는데 호숫가를 따라 카페로 가는 그 길이 얼마나 아름답고 산뜻하던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카페로 향했다.
하노이에서 손꼽아 좋아하는 브런치 카페에 갔다.
그날 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평상시 이 카페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블로그를 써왔었다. 마르코와도 함께 내가 애정하는 공간을 나누고 싶었다.
호숫가 옆에서 햇살을 받으며 토스트를 먹는데 마르코가 갑자기 다른 테이블의 한 사람을 보더니 '아는 친구'가 있다며 가서 인사를 하고 오겠단다. 고작 이 곳에 온지 2주밖에 안 된 마르코가 '아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보나마나 뻔한 얘기였다. 아마 데이팅 앱으로 만난 다른 여자였을 것이다. 마르코가 그 카페에서 그 여자를 처음 발견했을 때 몹시 곤란한 표정이었는데, 그럼에도 인사를 나누고 오겠다는 그는 꽤나 오랜 시간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왔다. 쿨해야만 했다. 나는 그와 비독점적 관계에 합의한 사이었으니까 살짝 뒤를 돌아봤는데 원래 눈이 별로 안 좋아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 기준으로는 나보다 매력적인 외모의 여성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래야 쿨한 상태를 유지하기 더 쉬울 것 같았다. 다시 우리 테이블로 돌아온 그에게 "오메 Look at you! 벌써 하노이 스타 다 됐네!'하고 여유롭게 운을 뗐는데 마르코는 머쓱한지 엄청 횡설수설하게 나불거린다. 자기는 이래서 이런 도시에 사는 게 싫다고 익명성의 사생활을 유지하고 싶은데 이런 도시에 살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돼 사생활 침해가 된다고. 방금 전 적극적으로 그녀가 있던 테이블에 가서 인사를 하고 온 사람치고는 상당히 적대적인 발언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냥 부드럽게 "그래? 왜, 아는 사람 우연히 만나면 좋지 않나? 나는 반가울 것 같은데~"라고 대꾸해줬다.
그런데 그렇게 그 여자를 마주했을 때부터 무언가 마르코의 삔또를 상하게 했나보다. 자꾸만 툴툴대는 마르코. 심지어 이렇게 말을 한다. "어젯밤에 시간 같이 보낸거 재미있긴 했다만 나 원래 주말 내에 일 다 했었어야 했는데 아침에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해버렸다. 원래 오늘 밤 같이 나가서 놀려고 했는데 밀린 일하려면 못그럴 것 같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정확히 "I wasted my morning"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함께 보낸 사랑의 시간들이 밥을 먹고 나니까 '낭비'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그렇게 느껴졌다고 해도 누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 앞에서 그게 '낭비'였다고 표현을 해?.. 이건 연인관계를 떠나서 친구관계에서도 엄청 무례한 경우가 아닌가 싶었다. 마르코는 아무렇지 않은지 이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얘기를 나불나불댔다. 필자는 그 말의 충격을 한 박자 조금 늦게 느꼈다. 그래서 "잠깐잠깐, '아침에 시간 낭비했다'는 얘기에서 지금 이 스탠드업 코미디 얘기로는 어떻게 이어진거야?"라고 물었다. 그는 머쓱해하며.. "아니, 그냥.. 생각나는대로 말한거였는데..?"라고 대답할뿐 사과를 하지 않았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작별인사를 한 뒤 집으로 향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꾸 눈물이 차올라 소리내 엉엉 울었다. 원래 슬픈 영상이나 음악을 듣거나 대화를 할 때는 쉽게 우는 편이지만, 그냥 아무것도 없을 때 혼자서는 울음을 잘 터트리지 못하는데 그때는 어찌나 서글펐는지. 내가 쏟은 귀한 애정의 순간들을 ‘낭비’로 표현을 하다니 그것도 내가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내 집에 오고 싶어서 오고, 자기가 친근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보낸거면서. 필자는 보통 단호함과 절제랑은 거리가 먼 편이라 필자의 손해여도 상대방을 받아주고 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누가 봐도 토론의 여지 없이 잘못한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해서는 - 보통은 그것이 세 번 정도 반복되어 '실수'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경우 - 가차 없이 문을 닫게 된다. 눈물의 오토바이를 타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필자는 사귀지도 않은 마르코와 이별했다.
그러면서 난 어째서 이렇게 기본적인 사랑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저 흔한 연인처럼 사랑을 주고 받고 할 수는 없는걸까 싶어 서려워졌다. 갑자기 6년 전 헤어진 남친까지 생각나면서 마음의 깊은 상처를 남긴 그 이별 이후에도 그렇게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건지 너무 억울했다. 계속 차오르는 눈물이 볼록거울 같이 시야를 가려 문득 운전하다가 조금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빗 속에서 운전하던 프로바이커의 경험을 토대로 눈을 깜빡거려가며 눈물범벅이 된 채로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집에 돌아가 무작정 잤다. 그냥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괴로워서 자야만 했다. 역시나 한숨을 자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여전히 침대에 남아있는 그의 아기 냄새 - 향긋하면서도 우윳내 같은 그 냄새가 가슴을 시리게 했다.
진이 빠진 상태로 공허함을 느끼다가 좌절감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운세를 보았다. 위로를 받고 싶었나보다. 베트남에 살고 있으니 베트남 사람들이 사랑하는 별자리 운세를 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여러 검색결과 중 보그 인도의 오늘의 별자리 운세가 눈에 띄어 클릭해 보았는데 소름이 끼치도록 공감되고 위로가 되는 글이 나왔다.
소외감이나 절망감 때문에 무너지는 것들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지만, 예상과는 다른 형태로 다가오더라도 과감히 “예스”라고 말해보세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천국 같은 순간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짜 집'을 마침내 찾게 될지도 몰라요.
우주의 조언: 지금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나고 있는 중이에요.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당신의 마음에서 울려 퍼지는 순수한 공명**으로 만들어지고 있어요.
**‘공명(Resonance)’은 당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강하고 조화로운 에너지 또는 주파수를 의미해요. 이는 당신의 감정, 바람, 그리고 의도를 상징하며, 당신이 내뿜는 긍정적이고 진실된 에너지가 주변 세계를 형성하고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에요. 물리학에서 공명이 진동을 증폭시키듯이, 여기서의 공명도 비유적으로 당신이 가진 감정적·영적 에너지가 당신의 깊은 바람과 꿈에 맞는 경험들을 끌어당기고 더욱 확대시킬 수 있음을 의미해요.
내가 그동안 나의 '진짜 집'을 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쏟아온 노력이 물거품이 아니라 이미 어떠한 효과로서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너무 위로가 됐다. 마르코와의 날들은 9-11월간 일어난 일이었는데 1월의 마지막 날인 지금까지도 이 글귀는 필자의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남아있다.
다행히 그 사건 이후로 이틀 후 한국에 휴가를 가게 되었다. 휴가를 갔다가 다시 하노이에 돌아왔을 때 그가 여전히 오피스에 있었으나 필자는 더를 그를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보지 않았다. 시간을 두고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그를 보아도 평점심을 가질 수 있었다. 오피스에서 마르코와의 마지막 날들은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