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어떤 시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또 Mar 10. 2017

제가 이걸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할까요.

똑똑한 세상 속 똑똑하지 못한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1. 아픔


  가, 나, 다. 강아지는 멍멍, 고양이는 야옹.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림 카드를 보며 낱말을 배웠고, 눈으로 보고 소리를 듣고 손으로 만지며 말을 배웠다. 일종의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사회와의 계약이었다. 이렇게 생긴 건 토끼라고 말해야 해! 지금 보이는 색은 노란색이라고 해야 해! 와 같이 거의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표현할 수 있도록 학습했다. 생각해보면 모두 실체적 대상이 있었다. 심지어 눈에 명확한 각종 명사뿐만 아니라, 각종 의성어, 의태어까지 친구들과 손 잡고 함께 듣고 보며 배웠다. 병아리 울음소리를 함께 들으며 삐약삐약을 배웠고, 한강을 바라보며 물이 출렁출렁거린다는 표현도 배웠다. 그뿐 아니라 눈에서 물이 나오는 사람을 보며 슬프다는 감정을 배우기도 했고, 감정이란 참 신기해서 주변 사람과 함께 동화되며 저 깊은 가슴속이 북받치는 듯한 새로운 감정들을 배우기도 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아직도 내겐 유치원생처럼 어버버 거리며, 표현력이 한참 부족한 상황이 올 때가 있다. 온갖 상상력과 표현력을 끌어올려 내가 느끼는 그대로 전달하고자 노력하지만 상대방과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상황. 바로 내가 아플 때 혹은 너가 아플 때.

  아픈 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영혼의 동반자라 같이 아픔을 느낄 수도 없고 같은 고통에 같은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인지 의심도 간다. 그동안 배워온 것들은 빛, 냄새, 소리 등의 외부 요인에 의한 인지 능력에 근간이 되었다면, 아픔은 온전히 내 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너의 노란색이 나의 초록색이고 너의 초록색이 나의 노란색인지, 내가 맡고 있는 냄새를 너도 똑같이 인지하고 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의 대상 혹은 감각에 대해서 같은 말을 말하도록 학습되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온전히 내 안에서 시작된 아픔에 대해서는, X-ray나 MRI가 내 몸을 꿰뚫어 보기 전까지 온전히 내 말만이 고통에 대한 표현 및 공유를 담당할 뿐이었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그리고 느껴볼 수 없는 순간인 것이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세요?"

  이렇게 친절하고도 답 모를 질문이 또 있을까. 나는 간혹 병원에 도착해 진료실 문을 넘어서는 순간,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의) 시크 모드를 고수하는 척하지만 실은 정말 뭐라 말할지 몰라 합죽이가 될 때가 있다. 배가 아파요라고 한 마디만 스리슬쩍 흘린 내게, 친절한 간호사 언니가 되묻는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세요?" 친구들과 항상 하던 '윗배야, 아랫배야?'의 장난을 할 순 없으니, 좀 더 진지하게 내 안 어딘가 있을 깊은 표현력을 한껏 끌어모아 대답한다. "여기 언저리가 쿵 울리듯이 웅웅 거리며 갈고리로 긁어내듯이 아파요." 그러면 간호사 언니는 당황했지만 프로페셔널한 미소와 함께 조용히 날 의사 선생님께 데려다주었고, 의사 선생님은 내 배를 직접 눌러보시며 어디가 아픈지를 물어보셨고(아파요, 안 아파요만 대답하면 되는), 스무고개를 하듯이 다른 증상들에 대한 (네, 아니요만 대답하면 되는) 질문을 통해 내 병을 파악하셨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 탓인지,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처방해주시곤 하셨다. 사실 가끔 의심이 들 때가 있긴 했지만, 참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 목이 칼칼하게 아픈 걸 보니, 내일부터 기침이 나기 시작하고 모레부터는 콧물이 나오기 시작하겠군요, 라며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는 감기와는 다르다. 기침이 멈추지 않아요, 노란색 콧물이 나와요와 같이 표면에 드러나는 현상을 읊는 것과도 다르다. 감기와 같이 흔히 겪는 질병, 혹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해선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처음 겪는 나의 고통, 아픔에 대해서는 한없이 곤란해졌다. 이 처음 겪는 고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이 고통에는 어떤 의성어 혹은 수식어가 붙어야 맞는 것인지, 해부학을 배운 적도 없는데 이 부위가 어디인지 나는 모르는걸요.


  하지만 병원에서는 세상의 각종 아픔을 통달한 의사 선생님이 도와주신다지만, 일상에선 누구도 딱히 정답을 말하진 못한다. 헬스장에서 허리가 아프다는 내게, 착하신 PT 선생님은 허리가 아픈 건지, 쑤신 건지 걱정 어린 질문을 하신다. 나는 아직도 아픈 것과 쑤시는 것의 차이는 모른다. 머리가 아프다는 내게, 걱정 많은 엄마는 쿡쿡 쑤시듯이 아픈지 욱신욱신 아픈지 묻는다. 지금 아픈 느낌이 쿡쿡 쑤신다는 표현이 맞는 걸까, 욱신욱신과 지끈지끈의 차이는 무엇인지는 누구도 내게 알려준 적 없고 알려줄 수도 없는 부분이었다. 마침내 상상력을 발휘해서 '머리가 찌르듯이 아픈 것보다는 눌린 듯이 아파요'라고 표현해봤자, 네. 그대 역시 저처럼 이해 못하시겠죠. 왜 우린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데 서로 이해를 못하는 걸까요. 엄마는 그저, 먹고 푹 자라며 내게 만능약 타이레놀 두 알 챙겨주실 뿐이었다.

  몇 년 전, 친구와 길을 걷다 갑자기 다리가 아파 주저앉은 적이 있었다. 친구는 놀란 채 다가와 급하게 물었다.

"갑자기 다리가 아파? 어디가 아픈 거야? 저린 거야? 쥐가 난 건가? 뭐라고 설명 좀 해봐."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기에 지금 내 아픔이 저거인지 말로만 듣고 내가 알 턱이 있나. 이를 뭐라 설명할 길이 없어 그 와중에도 그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름은 모르겠는데, 여기 종아리 뒷부분이랑 발목 사이가 길게 아파. 그냥 뭔가 자글자글하기도 하고, 즈르르르하게 아파. 그런데 쥐 난다는 게 뭐야?"

  그리고 물론 그때 그 친구도 자세히 설명해주지 못했고, 나는 아파 죽겠는데 정신까지 삐딱해지는 기분이었다. 뭐야. 언젠가 다리에 쥐가 날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며 머리가 맑아지고 '이것이 바로 쥐가 난다는 거구나'라고 깊은 깨달음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얻어야 하는 건가?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이용한다. 노래 혹은 기억하고 싶은 소리를 담기 위해 녹음을 하기도 한다. 시각에서 촉각까지 이루어진 오감과, 더불어 통증까지 모두 온전히 내가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게 발전해온 오감과 달리 통증에 대해서는 아무런 공유 및 학습이 불가능해져 왔다. 물론 '너네 모두 나의 고통을 느껴봐', 혹은, '느껴지니? 이 고통이 욱신거린다는 거야', 라는 미래를 상상만 해도 끔찍하긴 하다(솔직히 과학적으로는 가능한 미래이지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병원에서는 표현하지 않아도 정밀한 검진이 가능하도록 의학이 발달해 왔다지만, 함께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단순히 너와 나의 일상 속 커뮤니케이션 안에서는 영원히 100% 공감하지 못할 분야인 것이다.

  내가 단순히 내면의 고통을 표현하는 예술가였다면, 행위 예술을 하든 메탈 음악을 연주하든,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든 나의 자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 속 커뮤니케이션에선 도움을 청하거나 공감을 얻는 등의 명확한 목적이 있다. 모두가 정확히 대상을 그려내고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린 모두 각자의 경험의 의거한 개인적 허상을 공유하고 소통한다. 통계학처럼 각자의 표현을 95% 유의성으로 일일이 따지진 못하지만, 나는 평생 겪지 못할 너의 경험, 너는 평생 겪지 못할 나의 경험이 소통 가능하도록 말을 하나하나 맞춰나간다. 

  추상적이고 우리가 온전히 나만의 뇌로만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직 개개인의 주관적 표현과 서로의 신뢰로 인터랙션이 행해지고 있다. 하루하루 기술이 급변하는 사회 속, '뼈가 욱신거려' 혹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군'과 같은 말들은 모두 너와 나의, 의사와 나와의 보이지 않는 굳은 원초적 믿음과 신뢰의 결과였던 것이다. 인공지능이나 SIRI는 절대 공감하지 못할, 고통을 느껴본 자들만의 끈끈한 의리!...라고 정리해볼까 했지만 역시나 징그럽긴 하다.


  그렇게 다리가 아파 주저앉았던 날, 친구는 내 설명을 듣더니 아리송한 표정과 함께 말했다. "응. 그게 쥐 난다는 거야." 친구의 머릿속에 있는 '다리 쥐남'의 정의와 그 날 내가 습득한 '다리 쥐남'의 정의가 같을지는 나 역시 아직까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다리 쥐남' 교리 및 사상을 전파했다. 그 사람들 역시 자신들이 습득한 각양각색의 '다리 쥐남'을 퍼뜨리게 될 것이다. 원초적인 신뢰 기반 커뮤니케이션인 것이다. 가령 너의 욱신거림이 나의 지끈거림이고, 나의 욱신거림이 너의 지끈거림임을 과연 어떻게 판별한다는 것인가? 같은 것을 말하고 있음을 그저 믿을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