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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현철 Nov 07. 2022

의사봉의 무게

무너진 교권을 다시 세우는 방법

<교사다움을 이야기하다>는 매거진을 기획하고 교사의 입장에서 보다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며칠간 하루에 2~3만 명이 방문하고 거기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대변하는 댓글을 보면서 처음엔 신기했고 나중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처음엔 부정적인 댓글에도 '관심, 감사합니다'로 대응하려고 했다가 의견은 의견 그 자체로 두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에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설왕설래하며 의견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께서 공감과 응원의 댓글로 힘을 주셨고, 말씀은 없으시지만 라이킷으로 동의해주신 수많은 분들도 역시 고마운 분들입니다. 


7만 뷰를 넘어가면서 오히려 시리즈의 다음 글에 대한 부담이 생겼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학생의 인권과 교권의 충돌로 비치는 현상을 보면서 시리즈의 다음 글이 또한 어떤 파장을 몰고 올는지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오늘 다음 시리즈를 발행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적과 의지 그뿐입니다. 반응을 미리 예상하고 논조를 조절하며 어중간한 말들로 채워진 글보다는 아프더라도 환부를 직접 도려내는 칼이 필요하다는 생각 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 환자를 살리는 일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입장에서 논쟁을 바라보니

저자의 입장에서 논쟁을 바라보는 마음은 이렇습니다. 첫째는 고마운 마음입니다. 내 글에 관심을 가져주고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 댓글을 다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표현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 댓글에 대댓글로 응답하며 독자 스스로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되다니 이건 참 고마운 일입니다.


다음으로는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최O성님의 댓글 "지금 교사들은 안타깝지만 기존 중년 이상 교사들이 쌓아온 업적이 터지는 거죠. 지금 제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했지만 아이에게 분풀이성 체벌이나 어떠한 모욕을 준다면 몽둥이 들고 찾아가서 다 부숴버릴 겁니다"을 읽고 있으니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어쩌면 그 말씀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무식한 교사들도 꽤 많았습니다. 학교마다 '미친개'라는 별명을 가진 교사는 하나쯤 늘 있었고, 그 미친개가 시계를 풀면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배 교사들 중에는 그런 분도 분명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랬다는 이유로 '맞아, 이건 과거 선배들의 과오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야'라고 생각하기에는 지금 교실에 있는 다수의 아이들이 참 안타깝습니다. 


X세대는 1960~70년대 베이비 붐 이후 태어난 세대를 지칭하는데, 전체적으로 대표적인 특징을 묘사할 수 없것이 특징인 세대입니다.(상담학 사전, terms.naver.com)  요즘 부모님들의 경우 대부분 X세대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세대에 교사로부터 당했던 부당한 억압과 비 인격적인 체벌을 당했던 경우 여기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으로 인해 자녀들은 이런 일을 겪게 하지 않겠다는 강한 반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학교에 대한 불신과 특히 교사에 대한 반감은 트라우마로 남았겠지요. 이런 경험이 당신에게 있으시다면 시대를 떠나 대한민국 교사 중 한 사람으로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은 노인이 되셨을 그 당시 미친개를 이제 용서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도 그랬던 자신을 분명 뉘우치고 있을 테니까요. 




교권보호위원회가 열리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올해 두 번 교권보호위원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저는 안타깝게도(?) 교권보호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사안은 늘 있어왔지요. 그리고 많은 교사들이 학생과 관련된 사안으로 인해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부덕의 소치로 여기며 개인적으로 감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사 문화에서도 '내가 잘 가르치지 못해서'라는 생각에 괴로워할 뿐입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힘겨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교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1~2년 전에 불과합니다. 많은 교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교실의 어려움과 문제들이 곪아 터지게 되자 '이렇게는 안된다'위기감이 발동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원의 지위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은 2021년 3월에야 제정되었습니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의미입니다. '교원의 지위를 보장하고'가 아니라 '교원의 지위를 향상시키고'라는 입법 목적도 이미 교원의 지위가 바닥이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변화를 위한 첫걸음을 누구보다 응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권보호위원회를 열기로 한 것입니다. 사안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분명하게 하고 싶은 것은 교권보호위원회의 목적이 학생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의 학생을 처벌하고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모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려움을 당한 교사들 제도적으로 돌보고 배려하며 학생과 교사 모두를 위한 상생의 길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의사봉을 마주하고 있는 마음이 무거운 이유입니다. 의사봉의 끝에서 나올 결과가 절망이 아니기를 바라며 숙의의 과정과 시간을 통과합니다. 열띤 토론과 의견교환으로 합의점을 찾아갑니다. 교권보호위원회에서 교사의 비율이 과반을 넘을 수 없도록 한 규정 또한 공정을 조금 더 담보하기 위한 일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회적인 합의가 학교를 되살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두를 위한 행복한 결말은 없을까?

'교사다움을 이야기하다'라는 시리즈의 결론은 교사가 교사 다워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말고 교사다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조금, 아니 많이 부족합니다. 그 노력이 진정성을 가지고 지속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동력이 필요합니다.  건강마녀님께서 공감해주신 '교사일 수 있도록 지원하는 환경 구축'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껏 우리는 학생과 교사만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교육의 중요한 구성원은 이 둘 뿐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요소가 있으니 바로 학부모입니다. 저는 학부모에게 답이 있다고 믿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을 사랑한다',  '학생은 교사를 존경한다'는 기본적이고 이상적인 결론에 앞서 '학부모는 교사를 신뢰한다'가 전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흡사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처럼 서루 누가 먼저 하면 이라는 조건은 달지 맙시다. 교사는 교사의 할 일을 하고, 학생은 학생의 할 일을 하면 됩니다. 학생의 힘이 세지거나 교사의 힘이 세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쪽의 힘이 세어지면 불가피하게 억울한 한쪽이 있기 마련입니다. 다만 학부모가 교사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학생을 지도하기 위해, 그래도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아이를 붙들고 있을 때 결정타를 날리는 것은 결국 학부모입니다. 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합니다. 선생님' 표현하는 부모님들 보았습니다. 그 선생님은 그 부모님의 얼굴을 못 이겨 아이를 끝까지 지킵니다. 반대로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하고 선을 긋는 부모님도 계십니다. 그럼 교사가 더 이상 아이를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어집니다. 교사의 무릎을 꺽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사를 진심으로 믿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기적에 가깝습니다.) 




오늘 학부모 두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두 분은 부부입니다. 손을 꼭 잡아주십니다. 고맙다는 말씀만 전하고 가셨는데, 그 말씀 덕분에 저는 이 아이를 놓을 수 없습니다. 그 아이는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힘든 아이'입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힘든 아이가 사랑스럽게 보이는 마법, 학부모님이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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