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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키 Nov 28. 2024

'좋은 회사'의 의미를 생각하며

신기루, 공중누각, 환상, ......

이왕 노비라면 대감집 노비가 좋다던데

흔히 말하는 '노비'지만 대감집 근처도 비벼보지 못했다. 붙을 자신이 없어서 서류 제출도 해보지 않았다. 무난한 이력서를 이 회사, 저 회사에 난사하며 살다 보니 그렇고 그런 회사만 다녔었다.


면접에서 좋은 기운을 받고 입사한 회사에 다닌 지 오늘로 한 달이 지나 소중한 연차 1개를 얻었다. 내 커리어를 사 준 회사니 기분 좋게 다니고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알게 된 현실이 너무 가혹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 정도면 취업 사기 아닐까

하반기 마케팅 예산이 전부 삭감됐고, 내 자리인 MD 파트 예산은 원래 없었다고(.....?) 들었다. MD인 나는 국내영업팀 소속인데, 스무 명 남짓한 회사에서 국내 영업팀 팀원은 오로지 나 하나다. 팀장도 없고, 해외 영업을 담당하는 임원 한 명이 내게 일을 지시하고 있다. 실상은 그 임원의 해외 영업 포트폴리오용 자사 쇼핑몰 하나를 굴리면서 겉으로 보기 좋게 만드는 업무만을 담당하게 됐다. 


이래서 면접 때 "업무 강도가 높지 않아서 자기 계발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헤키 씨가 앞으로 이직할 때 도움 될 만한 일들 많이 해봅시다."라고 했나. 중의적인 의미였나. 이직에 대해 굉장히 쿨하게 언급하기에 '이번엔 말이 통하는 사람인가?' 했더니 그냥 쿨몽둥이로 맞아야 놈이었다. 타 팀원에 둘러싸인 자리에 앉아 홀로 판단하며 눈치껏 업무를 하는 MD. 그렇지만 예산은 0원인 MD의 삶. 




MD : Mㅓ든지 Dㅏ한다

여기에서도 물론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매일 판매량을 체크하고 물류팀에 발주를 넣는다. 당연하다. 난 MD니까. 전화 CS도 카톡 CS도 직접 진행한다. 나는 쇼핑몰이랑 오픈마켓 관리를 하고 있는 MD니까. 곧 출시될 신상품의 상세페이지 촬영을 사내에서 직접 하기에 촬영을 보조했다. 나는 MD이고 상세페이지가 나와야 판매를 할 수 있으니까.  B&A 샷이 필요하다고 해서 모델이 되어주었다. 상세페이지에 들어가야 된다고 하는데 난 어쨌든 그 상세페이지가 필요한 MD니까. 어제는 폭설이 내려서 마케팅 담당자와 눈을 맞으며 제품 추가 촬영을 했다. 솔직히 눈 오는 날 자연광이 예쁜 걸 아는 MD니까. 창고 이전을 한다기에 택배 집화점 이관도 신청해주었다. 나는 MD인데 물류창고에서 그건 MD 업무라고 하니까. 왜 그런지 정말 모르겠지만 물류창고에서 요청하는데 다른 사람들 업무는 아니니까. 


'마케팅'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잡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마케터 자리가 아닌 MD 자리로 온 건데(그것도 중간에 MD 경력이 있어서 살릴 수 있었음). 이 회사는 '쇼핑몰 관리'라는 이름 아래 온갖 잡일이 내려온다. 물론 이 회사만 그런 건 아닐 것 같다. 그저 기술직이나 전문직이 아니라면 누군가는 이를 깍 깨물고 잡일까지 하는 거다. 다만 그게 왜 나일 수밖에 없는 건지 항상 궁금하다.

 



좋은 회사란 과연 뭘까

직장인에게 좋은 회사란 어떤 의미일까? 돈을 잘 주는 회사, 내 업무 기량을 펼칠 수 있는 회사, 직원들의 마음이 잘 통하는 회사... 각자에게 와닿는 '좋은'의 의미가 전부 다를 것이라 예상한다. 나에게 다가오는 '좋은 회사'도 시시각각 변하는데 뭐. 


어떤 회사가 내게 좋은 회사일까,를 지금 다니는 회사의 자리에 앉아 월급을 루팡하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이번 회사는 앞으로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까?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다. 한 달을 만근해 생긴 소중한 휴가 1개를 손에 꼬옥 쥐고,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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