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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Nov 15. 2019

변화...그리고 성장

드디어 자의로 입을 떼게 된 날

"맨 앞자리에 앉아서"


Contract 교수님은 ‘call on’은 하지 않으셨지만, 수업 할 때 질문을 정말 많이 하셨다. 수업 주제가 contract인지라 교수님께서 교재에 나온 케이스와 비슷한 가상의 케이스를 많이 만들어 예를 들면서 설명하시면서 질문도 굉장히 많이 하셨다. 이해하기 어려운 다른 과목에 비해 contract는 딱딱 떨어지는 수학 공식과 같은 느낌이어서 좋았다. contract는 교재에 나온 사건의 분량이 비교적 짧기도 하고, 교수님이 사건에 대해 부가적으로 해주시는 설명이 재미있기도 하고, 다른 과목에 비해서는 그나마 수업 시간에 바로 이해할 수 있었던 과목이기도 해서 다른 수업보다 부담이 많이 없었다.


그렇지만 수업 들으면서 제일 힘들었던 시간은 침묵의 시간을 지날 때였다. 교수님께서 질문하셨을 때, 그 질문에 학생들이 바로바로 대답하는 경우도 있었고, 대답을 못 해서 한참 동안 침묵이 가라앉을 때도 있었다. 나는 교수님께서 질문하실 때마다 항상 맨 앞자리에서 눈이 마주칠까 봐 무서워서 눈을 노트북으로 내리깔거나 책을 뒤적거리며 열심히 답을 찾는 척했다. 수업을 듣는 학생으로서 긴 침묵이 흐를 때마다 괜히 교수님께 죄송해져서 속으로 만약에 한국말로 물어봤으면 내가 바로 대답했을 텐데 아쉽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교수님의 질문에 이어지는 침묵의 시간을 깨뜨리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책의 마지막 부분을 향해 달려갈 때쯤이었다. 학기 후반이 되고 기말고사를 대비해서 한 달 동안의 벼락치기를 시작하다 보니까 한 학기 동안 배웠던 모든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 맞춰지듯 하나씩 끼워 맞춰 지면서 하나씩 이해가 가던 시기였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교수님께서 질문하셨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은 채 오랜만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교수님이 질문하시자마자 나는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책을 뒤적거리며 답을 찾아보는 액션을 취했다. 맨 앞에 앉아있으면서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 하면 그 정도 모션은 취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용기를 조금 더 끌어모아"


책을 읽는데 그날 처음으로 왠지 교수님의 질문에 답인 것 같은 부분이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틀렸을 때의 창피함이 걱정되었고, 한 학기 동안 앞자리 앉아있으면서도 한 번도 손들어서 발표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제 학기도 끝나가는데 손들어서 말을 해서 뒤에 앉은 몇십 명의 친구들에게 주목받는 게 부끄러웠고, 튀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다. 눈은 그 부분을 계속 응시하면서. 보통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면 교수님이 먼저 답을 이야기해주시면서 넘어갈 만한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계속 학생들을 쳐다보셨다.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말하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결국은 그 긴장을 참지 못하고 정말 개미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말을 뱉은 데 의의를 두려고 했고, 교수님이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었다. 교수님이 들으셨나보다, 이런.


“What did you just say?”


“Ah... I said....”


“Yes, you are right! That’s right!”


교수님께서 정말 환한 얼굴과 목소리로 “네가 한 말이 정답이야.” “정말 완벽한 대답이야.” 같이 한 학기 수업을 하는 동안 처음으로 입을 뗀 학생을 향해 몇 초 동안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와 동시에 내 옆에 앉은 친구들로부터 대단하다거나 부럽다는 시선을 처음 받아봤다. 이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대답을 듣고 극찬을 하셨던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수업 시간에 학생으로서의 내 본분을 다했다는 만족스러웠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부끄러운 듯이 살짝 미소를 띠었다. 교수님께서 그 이후부터는 정말 신나 하시면서 강의를 계속해나가셨다. Civil Procedure를 가르치셨던 교수님에 비해 이 교수님은 살짝 차가운 이미지여서 교수님께 수업 끝나고 강단으로 나가 질문 한번 못 해봤고, 한 번도 말을 붙여보지도 못했고, 괜히 눈 마주쳐서 나한테 질문할까 봐 항상 살살 피해 다녔었다. 나한테 그런 이미지였던 교수님이 나를 향해 극찬하시는 것을 봤을 때 많이 놀랐다. 많이 뿌듯했다.


‘맞아, 이런 기분이었지. 공부 잘하는 기분.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다. 한 학기 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이제 실력이 팍팍 늘어갈 일만 남은 거야.’


오랜만에 나를 칭찬할 수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은 기말고사 준비에 힘들어하던 나에게 큰 원동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업 시간에 교수님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 듣기가 늘었다는 뜻이었고, 교재를 보면서 바로 영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뜻이었고, 수업 내용을 이해하면서 따라간다는 뜻이었고, 미국인 친구들 앞에서 영어 발음을 걱정하지 않고 내뱉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말하는 것에 대해 공포심이 줄었다는 뜻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수업 시간에 선생님 질문에 큰소리로 대답해서 반 친구들에게 부러움 섞인 시선을 받던 걸 즐겼던 내가, 대학 다닐 때부터는 까먹고 있던 그 옛날의 영광을 다시 느끼게 되다니, 그것도 미국인 친구들 앞에서!’


그날은 감동스러운 날이었다.


결국 첫 학기 시작할 때부터 가졌던, 교수님의 농담을 이해해서 친구들과 같은 타이밍에 웃고 싶었던 작은 소망을, 교수님 질문에 답을 한 번이라도 하고 싶다는 원대했던 꿈을 너무 늦지 않게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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