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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Nov 14. 2019

용기...그리고 변화

사람 봐가며 쥐어짠 용기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기는 쉽지 않다. 타인에게 속마음을 터놓는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내가 신뢰하는 그 사람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이해해주고, 나처럼 깊이 고민해주고, 가끔은 고민을 해결할 묘수를 말해주길 바라니까 터놓을 수 있다. 내가 신뢰할 만한 사람을 찾는다면.


하지만 쉽지는 않은 일이다. 뒷일이 걱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내 이야기를 들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까, 이야기한다고 상황이 해결되는 것도 아닐 텐데 부담 주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나를 꽁꽁 싸매기만 한다면 내가 하는 모든 결정은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의 선을 넘을 수 없다.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용기를 내면 내가 그릴 수 있는 미래보다 훨씬 더 괜찮은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인생은 모르는 거니까. 내가 가진 고민과 감정을 털어놓는 위험을 감수하고 다른 사람의 지혜를 얻는 선택은 어려울 테지만, 정말 급할 때는 해볼 만한 도박이다. 뒷일 따위는 걱정할 여유도 없는 응급상황이라면.  


"답 없던 나를 살려준 Career Advisor의 조언"


로스쿨에는 Career Development Office가 있어서 몇 명의 디렉터가 모든 로스쿨 학생들을 각각 몇 명씩 지명받아 그들의 career advisor가 되어서 졸업하기 전까지 인턴십 지원이나 취업 지원하는데 정보를 주며 보살펴주는 시스템이 있다. 나는 물론 이런 낯선 시스템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지만 내가 아직 한국에 있을 때부터 내 career advisor가 먼저 이메일로 인사를 하며 연락을 해주셨다. 아직 한국에 있는 나한테 두 번째 이메일을 보낼 때부터 내 어드바이저는 나에게 한 번밖에 없을 여름 인턴십의 중요성에 대해 알려주고 벌써 학교 사이트에 인턴십 구인공고가 올라왔다면서 관심 있다면 지원해보라고 하셨다. 일반 JD라면 두 번의 여름방학이 있어서 두 번의 여름방학 인턴십 기회가 있지만 ‘2년 JD’는 한 번의 여름방학밖에 없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인턴십 기회가 정말 중요했다.


아직 학교생활 시작도 안 했는데 인턴십 준비를 해주시려는 어드바이저의 이메일을 받고는 많이 당황했다. 입학하기 전까지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니까 OT가 시작되자마자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OT 두 번째 날에 내 어드바이저의 오피스에 가서 내가 대학교에서 했던 공부와 경험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인턴십 지원을 위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먼저 만들기로 했다. 그러면서 인턴십 말고도 학교 적응하는 데 힘든 부분이 있으면 오피스에 들러도 된다고 말씀을 해주셔서 멘붕의 첫 주차에 급하게 어드바이저의 오피스에 들르게 되었다.


“이제 첫 주차 수업을 시작했는데 교수님들 말씀 하나도 못 알아듣겠고, 어떤 교수님은 수업 시간에 ‘call on’을 하시는데, 교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조차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서 저는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수업 준비로 읽어야 할 분량이 너무 많은데  읽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형법에 관심이 있어서 검사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대학교에서 책으로만 배웠지 미국 법원에 대한 이해도 어렵고 영어도 완벽하게 못 하니까 도저히 해낼 자신이 없어요. 지금부터 검사가 되기 위해서 가 준비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이제 처음 시작한 로스쿨 생활에 너무 압도되어서 모든 방면에서 어떻게 따라가야 하는지 갈피조차 잡지 못한 좌절스러운 마음을 말씀드렸다. 내 어드바이저는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


“수업도 이해가 안 가고 교수님 말씀도 못 알아들어서 무섭다면 교수님 오피스에 찾아가서 아직 영어로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call on’ 하시는데 이름이 불릴까 봐 부담스럽다, 그러니 ‘call on’ 할 질문들을 알려주셔서 미리 연습해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얘기하는 게 어떨까? 그리고 일단은 학교에서 성적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검사가 되고 싶다면 재판도 잘하는 게 중요할 거야. 그렇다면 우리 학교의 장점 중 하나인 캠퍼스가 다운타운이랑 거리가 가까운 점을 이용해볼 수도 있어. 미국에서 진짜 재판을 어떻게 하는지 보는 것도 정말 많은 공부가 될 테니까. 학교 셔틀을 타고 시내에 나가면 법원들이 많으니까 정장 입고 법원에 들어가서 재판 스케줄 보고 들어가고 싶은 재판에 들어가서 방청객 석에 앉아서 재판을 보게 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가끔 판사 중에 방청객 석에 앉아있는 너한테 왜 있냐고 말을 거는 사람도 있을 거야, 리치먼드 로스쿨 재학생인데 재판을 방청하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기특하게 여겨서 나중에 좋은 인맥이 될 수도 있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기발한 방법들이 그분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 조언을 많이 해주셨지만 당장 내가 행동으로 보여야 할 조언들은 이렇게 두 가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셨다. 나는 이곳의 문화를 잘 몰랐으니까 어드바이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교수님께 가서 ‘call on’ 할 질문을 미리 여쭤보는 게 실례가 아닌지, 재판도 없는 학생이 법원에 그렇게 들어가도 되는지 여러 번 다시 물어봤다. 어드바이저는 정말 간단하게 그 교수님은 그렇게 해도 잘 대해주실 교수님이라고 말씀해주셨고, 법원에서는 로스쿨 학생들을 쫓아내지는 않을 거라고 대답해주셨다. 어드바이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그대로만 해본다면 나한테 좋은 영향이 있으면 있겠지, 절대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만, 필요했던 것은 용기였다. 용기가 정말 많이 필요했다. 나는 낯선 사람한테는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정말 많이 망설이는 편이다. 어드바이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오피스에 온 이유도 이분이 먼저 미국에 오기 한 달 전부터 연락을 주고, OT 때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위해서, 나의 인턴십을 위해서 도와주는 헌신적이고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언제든 오라고 먼저 말을 건네줬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정말 아무한테도, 기숙사 같이 사는 친구한테도 제대로 털어놓지 못했던 고민을 유일하게 나에 대해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이 사람한테 털어놓으려 용기를 냈었다.


처음 이틀 정도 수업을 듣는데 교수님 말을 못 알아듣겠어서 정말 이대로 가다간 나는 망할 거라는 어두운 미래가 그려져서 하는 수 없이 ‘에라 모르겠다’라며 용기를 내서 어드바이저를 찾아온 것인데, 그분의 제안은 이보다 몇 단계는 더 높은 용기를 요하는 행동이었다. 대학 다닐 때도 다가가고 싶은 교수님은 멀리서 지켜보다가 그 교수님의 수업을 듣거나 활동을 같이하면서 오랜 시간 얼굴을 익힌 다음 오피스에 들러서 상담도 하면서 친해지고 그렇게 관계를 쌓아가곤 했는데, 이제 막 첫 주차에 만난 교수님은 조금 많이 부담스러웠다. 캠퍼스를 벗어나 셔틀을 타고 혼자 법원에 들어가는 것도 무섭고 부담스러웠다. 어드바이저의 제안을 들은 후부터 며칠 동안 머릿속은 계속 혼란이었다.


‘해야 돼 말아야 돼. 해야 하긴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면 내가 얻는 게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너무 무섭잖아.’


"용기를 끌어모아"


모든 수업을 다 한 번씩은 들어본 첫 주차 금요일. 자정이 넘어서까지 고민하다가 도저히 위기감을 이기지 못하고 새벽을 넘어선 이른 아침쯤에 교수님께 오피스에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빠른 행동이었다. 나는 첫 주차에 모든 교수님들이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말이 너무 빠르고 어려워서 수업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용기 내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것이다. 첫 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로스쿨의 수업 진도는 정말 빨랐다. 벌써 이만큼 휙 지나가 버린 강의들에 앞으로 16주 차까지 바보처럼 멍하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튀고 싶지 않았던 부끄러움을 이겨버렸다.


이메일을 보내고 나서도 이제 주말인데 월요일쯤에 연락이 오겠지 그때까지는 마음 편히 있어도 되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지런한 교수님께서는 예의 없게 토요일 새벽에 이메일을 보낸 학생에게 몇 분 만에 바로 답장을 해주셨고, 월요일에 찾아뵙기로 약속을 정해버렸다.


교수님 오피스에 가기 전에 교수님께 할 말을 혼자서 열심히 연습했다.


“Professor, I’m not fluent in English yet, so it is really hard to understand even what you’re saying in the class. Would you please help me prepare your class? I want you to practice with me that if you ask me questions that you would ask in the next class, I will give you answers and I may know how to answer to your ‘call on’ questions.”


내 어드바이저가 의도한 것은 분명 이렇게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감히 교수님께 질문만 알려달라고 말하기가 염치가 없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바꾸기가 조금 힘들어서 결국 내가 구사할 수 있던 영어로 가능했던 질문인 ‘같이 연습해줄 수 있겠냐’고 여쭤보는 질문으로 바꿔버렸다.


교수님 오피스 앞에서 잠시 진정할 시간을 가지고 이미 열려 있는 문에 노크했다. 교수님께서 웃으면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자리에 앉자마자 교수님께 내 소개를 간단하게 했다.


“교수님, 저는 Heather라고 하고 한국에서 왔고, 지금 교수님 수업을 듣고 있어요.”


“그렇구나, 우리 학교에 온 걸 환영한다. 수업은 잘 적응하고 있니?”


“사실 수업 시간에 교수님 말씀이 너무 빨라서 잘 못 알아듣겠어요. 그래서 질문이 있는데요.”


진도를 나갔던 부분들이 모두 다 이해가 안 갔지만, 아무 데나 한 부분을 찍어서 교수님께 여쭤봤다. 교수님께서 정말 친절하게 다시 설명을 해주셨다. 교수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이제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 제가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서 한 페이지를 읽는 데만 몇십 분이 걸리고 교재를 읽는다고 해도 완벽하게 이해를 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교수님 수업 시간에 하시는 말씀도 너무 빨라서 이해가 안 되기도 해요. 그래서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call on’ 하실 때마다 정말 무서운데, 혹시 제가 교수님 수업에 적응할 때까지 ‘call on’ 질문을 저랑 같이 연습해주실 수 있나요?”


“그러니까 오피스에서 ‘call on’ 질문을 주고받고 싶다는 거니?”


“네, 제가 한주 뒤에 배울 내용을 미리 복습해서 올게요. 그 케이스에 대해 ‘call on’ 할 질문들을 저한테 물어봐 주시면 제가 대답하는 연습을 하고 싶어요. 교수님만 너무 바쁘지 않으신다면.”


“그래, 그렇게 하자. 일주일에 한 번 정도면 어떻겠니?”


“네, 수요일에 찾아뵐게요.”


그렇게 2주 차부터 교수님 오피스에 매주 찾아갔다. 다른 두 과목은 너무 바빠서 수업 준비해갈 시간이 없어도 Civil Procedure는 내가 교수님께 요청한 거였으니까 수요일에 교수님과의 미팅을 위해서 정말 꼼꼼하게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매주 해야 할 과제도 많았기 때문에 제일 우선순위인 과제를 먼저 처리하고 나면 그다음 순위는 Civil Procedure 공부였다. 이 한 과목 공부하기도 분량이 벅차서 학기 초반에는 다른 두 과목은 거의 예습이나 복습할 시간이 없었다. 미팅하러 가면서 케이스의 많은 분량을 웬만하면 다 읽었고, 'case brief'도 꼭 챙겨보고, 구글에 검색해서 그 케이스에 대해 온라인에 나와 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알아갔다. 오피스에 들어가서 앉고 나면 항상 교수님이 먼저 물어보셨다.


“자, 오늘은 어떤 케이스에 대해 말하고 싶니?”


“오늘은 이 케이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제가 케이스를 이해했는지 먼저 간단하게 말씀드려볼게요. 이제 질문해주세요.”


교수님께서 케이스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를 위한 질문을 하시면 그 부분에 대해 대답을 하면서 아주 느리지만, 천천히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도 안 해본 '나머지 공부'였다.


"고작 한 시간이 차곡차곡 모였을 때"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교수님과 보냈던 일주일에 한 시간이 나한테 주었던 영향은 엄청났다. 교수님께서 케이스의 어떤 세부적인 내용에 관해 물어보실지 모르니까 케이스를 꼼꼼히 읽어야 해서 읽기 실력이 늘었고, 점점 영어로 로스쿨 책을 읽는 데에 익숙해져서 읽는 데 드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다. 교수님께 케이스에 대해 내가 이해한 내용을 말해야 하니까 케이스에 나온 단어들을 이용해서 교수님께 말씀을 드리려고 내가 스스로 말하기 어려운 문장들을 외워서 교수님께 말씀드리면서 말하기 실력이 늘었다. 오피스 안에서는 교수님의 질문을 바로 이해하고 대답해야 하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영어를 듣는 버릇을 들여서 자연스레 영어 듣는 실력도 늘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교수님과의 연습을 거치면서 로스쿨 수업 방식에 천천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교수님과 미팅을 하면서부터는 Civil Procedure 수업 시간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더 이상 수업 시간에 교수님 말씀이 마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가지 않았다. 교수님의 말씀 속에서 빠르게 흘러가지만 내가 아는 단어들과 문장들이 귀에 꽂히기 시작했고, 그렇게 서서히 교수님의 강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교수님께서 'call on’을 하시려고 출석부를 찬찬히 훑어보실 때도 쫄지 않았다.


교수님께서는 기말고사를 몇 주 앞둔 날, 나를 ‘call on’ 하셨다. 그동안 수도 없이 연습하며 대비를 했던 ‘call on’을 받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답을 했다. 교수님의 세부 질문에도 대답을 무사히 마쳤다. 내 어드바이저와 교수님의 도움 덕분에 공포의 ‘call on’도 무사히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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