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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Nov 14. 2019

이것은 데자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영어 단어 정리

이제 곧 학기가 시작하니까 수업 준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비장한 마음을 먹고 책을 펴서 읽으려고 했는데...읽을 수가 없었다.


‘이런...데자뷔네....’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 영어 원서를 처음 열어보고 느꼈던 그 똑같은 절망적인 기분.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모르는 단어들이 너무 많아서 문장을 해석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도 나는 대학교 생활 내내 영어 원서로 단련되어서 더 이상 그런 기분은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로스쿨에서 그것은 근거 없는 자만이었다. 로스쿨 책에 비교하면 대학교 때 배웠던 책은 장난 수준이었다. 훨씬 더 어려운 단어들과 그에 더해 영어도 모르는데 라틴어 법률 용어까지 더해져서 처음에 내가 내 carrel에 앉아서 했던 것은 공부가 아니고, 책에 나와 있는 단어들을 해석해서 빈 노트에 영어단어와 한글 뜻을 적어나가는 '작업'이었다.


덕분에 내 노트북은 영어사전 역할만 했다. 노트북 화면에는 항상 네이버 영어사전이 열려 있었고, 그 사전도 해석을 못 하는 단어들은 구글에 쳐서 영어로 설명을 이해해야 했다. 학기 초, 로스쿨에서 쓰는 단어에 익숙해질 때까지 내가 저녁 12시까지 도서관에 남아서 했던 건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부가 아니고 번역이었다. 문제는 보통 일주일에 많게는 한 과목당 4번 수업이 있고, 적게는 2번 수업이 있었는데, 일주일 단위도 아니고 수업마다 교수님들께서 읽어야 할 분량들을 최소 20페이지씩은 과제로 내주셨다. 책에 나와 있는 케이스들이 판결문의 전문을 담고 있어서 한 케이스당 기본적으로 10페이지가 넘었다. 계산해보니 일주일 동안 모든 수업 준비를 위해서 최소 100페이지 이상은 읽어야 했다.


학기 초에는 따로 복습하고 공부까지 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일단은 주어진 분량부터 읽어보자고 결심했다. 노트에 줄을 내려긋고 왼쪽에는 영어단어를 쓰고 오른쪽에는 한글을 써 내려가며 천천히 단어를 정리했다. 그렇게 써 내려가며 영어 단어를 외웠던 중학생 때처럼, 고등학생 때처럼, 대학생 때처럼. 단어를 하나씩 찾고 문장을 해석하면서 한 페이지 정도 잘 읽고나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보니까 벌써 1시간이 지나 있었다.


‘망했다.’


공부하는 게 아니고 한 페이지 해석해서 문장을 이해하는 데만 1시간씩 걸리니 이 많은 수업을 예습해서 수업 시간에 들어간다는 것은 나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첫 주차에는 패기 있게 시작했지만, 끊임없이 단어만 찾는 것에 점점 지쳐가고, 너무 재미없어지고, 힘이 들어서 미국인 친구들한테 보통 책 읽고 예습해오는데 몇 시간 정도 걸리는지 물어봤다. 친구들이 20페이지 정도 과제가 나오면 그냥 책을 읽기만 하는 게 아니고 읽으면서 공부도 하는 건 보통 3, 4시간 정도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 출발선부터 다르다는 게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단어를 하나씩 찾는다고 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친구들한테 나는 단어를 하나씩 찾고 해석해야 해서 한 페이지 읽는 데만 30분 넘게 걸린다고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내 하소연을 듣던 친구 중의 한 명이 'case brief'를 보라고 알려주었다. 'case brief'는 몇십장까지 이를 수 있는 한 케이스의 판결문을 요약하여 사실관계, 법적 이슈, 법, 법의 적용, 판결이라는 중요 요소들을 한 페이지에 정리해 놓은 요약문이다. 대학교 때 교수님 수업에서 열심히 만들었던, 잊고 있던 'case brief'들이 떠올랐다. 친구가 알려주기 전까지 'case brief'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잘됐다 싶어서 몇십 장씩 되는 케이스들을 읽고 수업에 나가기 벅찬 응급상황일 때는 'case brief'를 구글에 쳐서 한번 읽고, 책에서도 그 중요한 부분들 위주로 읽고 수업에 들어갔다. 학기 초 수업 준비의 지옥에서 나를 구해준 친구의 조언 덕분에 조금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모르는 단어들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고, 내 노트는 필기가 아니라 영어 단어들로 뒤덮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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