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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Nov 13. 2019

악몽 같던 학교생활의 시작

아직 OT 첫날 오전일 뿐인데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대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 내가 봤던 한국 드라마와 미국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의사, 변호사, 검사, 그리고 판사와 같은 화려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저마다 특출 나고 탁월한 능력들로 상황을 타개해 나갔다. 주인공들은 이제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사회 초년생이더라도 항상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고, 그들은 주인공답게 항상 정의를 꿈꾸며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런 드라마는 거의 매번 행복하게 끝이 난다. 위기를 멋지게 이겨낸 주인공들의 활약으로 주변 사람들도 그들을 인정하게 되고, 그들은 결국 일과 사랑을 쟁취하며 행복한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평범한 청소년들은 그런 드라마에서 나오는 멋있는 주인공들을 보며 내 미래도 저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라며 꿈을 키워나가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내가 그 피해자 중 한 명이다.


‘나도 이만큼 공부를 하고, 이만큼 경험을 하게 되면 위기 상황에서 드라마 주인공처럼 멋지게,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나도 조금 더 공부하고 조금 더 경험하면 멋있고, 똑똑하고,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어른으로 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신의 선택을 받아 아주 똑똑하게 태어난 사람들에게나 해당할지 모른다. 주인공을 꿈꾸던 평범한 학생은 로스쿨 첫날부터 차가운 현실과 마주 해야 했다.


"두근두근 OT 첫날"


의자에 앉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미국 드라마 Suits에서 보던 것과 정말 똑같은 연한 아이보리 색의 벽면과 짙은 갈색으로 칠해진 판사석 책상과 변호인들의 책상으로 꾸며진 모의 법정 안에 앉아 있었다. 내가 훗날 리치먼드시와 뉴욕시에서 봤던 실제 법정들과 비교해도 꽤 큰 편에 속하는 이 리치먼드 로스쿨의 모의 법정 안에는 앉을 틈 없이 사람들로 빽빽했다. 판사석 책상을 가운데에 두고 양옆으로 배치된 배심원석에는 교수님으로 보이는 분들이 앉아계셨고, 두열로 놓여 뒤로 열 줄이 넘게 배치된 방청객 석과 그마저도 부족해 2층 테라스에 남는 방청객 석에는 새로운 로스쿨 생활에 기대가 부푼 시끌벅적한 새내기들이 앉아 있었다.


짧은 단발에 키가 크신 백인 학장님께서 변호인 책상 뒤로 들어가서 방청객 자리에 앉은 학생들을 향해 서자 실내가 금세 조용해졌다. 학장님의 따뜻한 환영 인사와 함께 드디어 OT가 시작되었다. 이 모의법정에 앉아 환영 인사를 듣자 그제야 로스쿨에서 새로 학교생활을 한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 로스쿨에서도 해왔던 대로 멋있는 활약상을 보여 친구들과 교수님들에게 멋진 인상을 남겨야겠다는 깜찍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학장님의 인사말이 끝나고 인자하게 생기신 교수님께서 나오셨다.


“자, 이제 OT 첫 시간을 아주 가볍고 재미있는 주제로 시작해볼게요.”


교수님의 입에서 빠른 속도로 법률 용어랑 학문적인 영어 단어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교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희망찬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되려 나한테 위험 신호를 주기 시작했다.


‘방금 환영 인사까지는 잘 알아들었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영어 못 알아듣는데 자막 없이 미드를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열심히 교수님 얼굴과 피피티를 바라보며 알아듣는 척을 했다. 마지막 말은 알아들었다. 피피티에 이름 적힌 대로 조를 만들어 서로 토론하면서 너희 생각을 나눠보라는 말이었다.


‘이런, 큰일 났다. 망했다.’


곧, 생각이 바뀌었다. 다른 친구들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면 나도 할 말이 생길 줄 알았다. 우리 조는 나까지 포함해 7명이 같이 모여 앉아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자기소개 정도야 쉽지. 이름 얘기하고 한국에서 왔다고 얘기를 하면 돼. 다른 애들 토론하는 이야기 듣다 보면 대충 내용도 파악될거고. 걔네들이 했던 얘기랑 비슷하게 얘기하면 되지 않을까.’


기분 좋게 자기소개를 했다. 6명의 교우들이 내 옆을 둘러싸고 한 명씩 교수님의 가볍고 재미있는 주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역시 활발한 미국 아이들 덕분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만히 있던 나는 자연스럽게 마지막 순서가 되었다. 오늘은 내가 기대했던 신나고 재미있는 OT 첫날에서 자꾸 비껴가는 느낌이었다. 아직 OT  첫날인데. 아직 오전일 뿐인데.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절망스럽게도 나는 마지막 친구 차례가 될 때까지도 전혀 어떤 쟁점인지 감을 못 잡았다. 어느덧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말을 끝내고 모두의 눈동자가 나를 향할 때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절망감이 나를 덮쳐왔다. 몇 초 정도의 침묵 뒤에, 더 이상 끌면 어색해질 것 같은 때,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음…. 나는 옆에 애가 한 말에 동의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뻔뻔하게 그게 정말 내가 할 말의 끝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살짝 미소를 보였다. 그 몇 초 안 되는 순간은 정말이지 내 인생 최악의 수치스러운 날이었다. 내가 2년 동안 경험한 미국 로스쿨은 원래 그런 자리가 있으면 틀리든지 맞든지 중요하지 않고, 틀린 내용이더라도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휘황찬란하게 말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로스쿨은 학부 때보다 더 논리적인 것을 좋아하고 말 잘하는 학생들이 지원하는 곳인데,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했던 대답은 정말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멍청이나 하는 대답이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창피하게 느꼈던 이유는 내가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이다. 별생각 없이 학교에 갔는데 막상 학교에 도착하고 OT에 참석한 학생들을 보니 150명 정도 넘는 인원에 정말 130명 가까이가 백인이었고, 그래서 내가 자기소개할 때 한국에서 왔다는 내 얘기를 듣고 조금 더 호기심이 어린 표정들을 봤기 때문이다. 혹시 이 친구들이 아시아에서 미국 로스쿨 올 정도의 학생이면 굉장히 똑똑해서 그런 건가 하는 기대심을 가지고 있나 생각할 정도로 나를 쳐다보는 친구들의 기대에 부푼 얼굴을 봤기 때문이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바본데, 내가 그걸 모르고 엄청난 곳에 들어왔구나. 여기는 내가 있어서는 안 될 자리구나. 여기는 아닌 것 같아. 나 다시 한국 가면 안 되려나.’


그날 그 순간은 학생으로 지내왔던 지난 18년 동안에 처음으로 내가 주변 다른 학생들의 수준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강한 열등감을 가져본 날이었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저런 친구들이랑은 경쟁조차 되지 않을거라는 강한 절망감을 가져본, 내 인생에서 역사적인 날이었다. 내가 점점 상급 학교로 진학하면서 더 넓고 더 높은 곳으로 갈 때마다 그곳에서 나보다 훨씬 더 능력 있는, 나랑 경쟁해야 할 대단한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됐지만 나는 그럴수록 자연스럽게 높은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달려서 계속 목표들을 이루어왔다.


2015년 8월 17일.


벽에 부딪혔는데 처음으로 무엇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이 자동으로 떠오르지 않은 날이었다. 정말 어쩔 줄 몰랐던 감정이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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